낭만 고릴라, 킹콩

글|김상연
한번 영화에 출연했다 하면 꽤 주목을 받는 동물이 바로 고릴라다. 야구하는 고릴라로 나온 우리나라 영화 ‘미스터 고’는 멋들어진 컴퓨터그래픽에 비해 큰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홈런타구를 경쾌하게 보여줬다. 고릴라의 대표 영화는 역시 ‘킹콩’이다. 이 영화는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빌딩을 오르내리는 고릴라의 모습을 깊게 뇌리에 새겨줬다. 그런데 영화 속의 킹콩은 진짜 야생 고릴라의 모습과 얼마나 닮은 걸까.
중년이 더 매력적인 수컷고릴라

영화 속의 등장한 킹콩은 나이가 좀 든 고릴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킹콩의 털 색깔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한 킹콩을 자세히 보면 얼굴과 온 몸에 은백색 털이 적지 않다. 특히 등판 아래가 온통 은백색이다. 이것은 고릴라 무리를 이끄는 대장 고릴라 ‘실버백’(Silver back)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고릴라 집단에서 흰 털은 강한 우두머리의 상징이다. 수컷 고릴라는 나이를 먹으면서 등에 은백색 털이 위풍당당하게 난다. 역시 킹콩은 위풍당당한 고릴라였다. 그렇다면 나이 든, 어쩌면 중년을 넘어선 고릴라가 과연 젊은 여배우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까. 고릴라 세계에서는 암컷이 젊은 고릴라보다 흰 털이 많은, 나이든 고릴라를 더 좋아한다. 젊음보다는 권력이 먼저인 셈이다.
혹시 킹콩이 여주인공과 뉴욕에서 다시 만날 때 가슴을 가볍게 두들기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여주인공은 “뷰티풀(Beautiful)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구나”라고 감격한다. 해골섬에서 여주인공이 킹콩에게 잡혔을 때 “뷰티풀”이라고 말하며 똑같은 동작을 하는데 이 행동을 킹콩이 따라한 것이다. 킹콩은 정말 여배우의 행동을 배운 걸까.
실제로 고릴라의 지능은 매우 뛰어나며 언어 능력도 있다. 과학자 프랜신 패터슨이 ‘코코’와 ‘마이클’이라고 하는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친 사건은 이런 능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다. 코코는 ‘음식’ ‘친구’ ‘더러운’ 등 수백 개의 수화 단어를 배웠고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말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고릴라가 ‘뷰티풀’ 정도의 단어를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피터 잭슨이 현대적으로 리메이크 한 영화 ‘킹콩(2006년 한국 개봉)’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킹콩이 티라노사우루스 세 마리를 물리치는 장면이다. 이처럼 고릴라는 매우 무서운 동물로 그려져 있지만 사실은 평화를 사랑하는 가족적인 동물이다. 고릴라의 한 종류인 마운틴고릴라는 덩굴, 고사리, 죽순 등 식물을 주로 먹는다. 가끔 달팽이나 곤충을 먹지만 하루 평균 2g 정도다. 다른 고릴라 종류인 로랜드고릴라는 과일을 많이 먹는다. 영화에서 킹콩이 댓잎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엄연히 사실이다.

이처럼 잡식동물이 분명한 킹콩이 어떻게 감히 티라노사우루스에 덤빌 수 있을까. 유명한 고릴라 학자인 다이안 포시의 책 ‘유인원과의 산책’을 보면 이런 의문이 풀릴 것 같다. 포시는 이 책에서 “성숙한 고릴라는 자기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이 때문에 밀렵꾼은 고릴라 새끼 한 마리를 잡을 때 안전을 위해 고릴라 가족 전체를 죽인다고 한다(이처럼 비극적인 고릴라 밀렵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결국 킹콩이 공룡과 싸운 힘은 바로 사랑이었다.
킹콩이 그녀를 사랑한 이유
영화를 보면 해골섬 원주민들이 킹콩에게 수많은 여성을 갖다 바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여주인공만이 킹콩의 사랑을 받은 것일까. 킹콩이 뉴욕에서 여주인공을 찾을 때 수많은 여성을 손에 쥐고 눈앞으로 끌고 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고릴라가 지독한 근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냄새를 맡아보기 위해서다.
미국 미시간대 지안쯔히 조지 장 박사는 “2300만 년 전 고대 영장류에게 페로몬을 감지하는 유전자(TRP2)가 있었다”고 말한다. 현대 영장류는 이 유전자가 퇴화됐지만 고릴라의 후손인 킹콩은 이 유전자가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여주인공이 킹콩의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그녀의 향기였던 것이다(혹시 향수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앤이 킹콩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떠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실제로 고릴라는 발정기에 들어간 암컷이 입술을 꼭 깨물거나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수컷을 간절히 바라본다. 우연하게도 앤의 행동이 고릴라 암컷의 구애 행동과 비슷했을지 모른다(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은 영화를 보고 고릴라의 진짜 모습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킹콩이 정말 그랬다는 건 아니다).
킹콩이 붙잡혀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에 선을 보였을 때 킹콩의 손과 발에 굵은 수갑과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자기 앞에 나온 여자가 그때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흥분해 쇠사슬을 뽑아내고 난리를 피운다. 쇠사슬이야 워낙 힘이 세니까 뽑아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수갑은 어떻게 풀었을까. 영화를 보면 킹콩이 힘을 주자 마치 수갑이 이미 풀려 있듯이 벗겨진다. 혹시 킹콩은 이미 수갑에 금을 내 반쯤 끊어놓은 것은 아닐까. 이 말은 고릴라가 도구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 고릴라는 머리가 좋다. 그리고 도구를 사용한다. 동물원에 있는 고릴라는 줄을 사용해 물체를 끌어당기고, 막대기로 물체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나온 고릴라 코코는 그림을 그릴 정도다. 야생 상태에서 고릴라가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도 2005년 처음 공개됐다.
미국 야생보호협회 토머스 브로이어 박사팀은 아프리카 콩고의 한 국립공원에서 야생 고릴라 두 마리가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이용해 물 길이를 재는 장면을 촬영해 발표했다. ‘레아’라는 이름의 암컷 고릴라는 막대기로 물 깊이를 재 물웅덩이를 건너갔다.‘에피’라는 암컷 고릴라는 나무막대기를 질퍽거리는 땅을 건너는 다리로 이용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과연 인간과 킹콩, 즉 고릴라는 얼마나 다를까. 인간과 침팬지가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은 알지만 고릴라는 어느 정도일까. 인간과 고릴라의 유전자를 비교하면 불과 1.75% 밖에 다르지 않다.
영국 웰컴트러스트 생어연구소 연구팀이 2012년 아프리카에 사는 서부저지대고릴라의 유전체(게놈)를 분석하고 침팬지와 인간, 오랑우탄과 비교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 유전자는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와는 약 1.37%, 고릴라와는 1.75%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랑우탄과는 3.40% 차이가 났다. 침팬지만큼은 아니지만 고릴라와 인간은 정말 가까운 동물인 셈이다.

연구팀은 유전자 비교를 통해 각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시기를 추정했다. 그 결과, 인간은 침팬지와 370만 년 전, 고릴라와 595만 년 전 갈라져 나온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기존 화석 분석 결과와 일치하지 않아 연구 결과를 다시 조정했더니 인간은 침팬지와 550만~700만 년 전, 고릴라와는 850만~1200만 년 전 분리됐다는 최종 결과를 얻었다. 연구팀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자 15%는 침팬지보다 고릴라와 더 가깝다고 한다. 우리 몸에도 고릴라의 유전자가 일부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과연 내 안에도 킹콩이 있을까.
필자 소개 / 김상연
김상연은 과학동아 편집장을 지낸 뒤 현재 동아사이언스 전문기자로 있다. 개그콘서트와 무한도전보다 더 재미있는 과학기사를 꿈꾸며 20년 간 과학기자를 해왔다. 과학이 그저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지만 과학을 알면 좀더 즐겁고 올바르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과학과 함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우리 옆집 과학자> <줄기세포> <과학이슈11> 등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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