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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바이러스가 있었다

작성일 2015-12-08

|정용석

 

에볼라, 메르스, 신종플루 등 인류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바이러스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매년 인류에게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다양성(biodiversity)은 지구에 살고 있는 세포성 생물체 전부를 합한 것보다 크다. 바이러스 개체의 숫자 또한 모든 생물 개체를 합한 수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닷물 1L에는 약 10억 개체 내외의 바이러스 입자가 있다. 이처럼 많고 다양한 바이러스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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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1 : 세포 퇴화설

어떤 세포들이 자신의 유전정보를 점점 줄여가다가 결국 다른 세포에 의존하는 생활사를 갖도록 진화했으리라고 보는 견해다. 바이러스의 증식이 세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전통적으로 세포가 생명체의 기본단위라고 믿는 일반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가설은 꽤 그럴 듯해 보인다. 그 예로 천연두 병원체인 폭스바이러스나 대상포진 등을 일으키는 허피스바이러스의 유전체는 매우 큰 DNA 이중가닥으로 80~100개에 이르는 유전자가 있다. 최근에는 미미바이러스나 피쏘바이러스와 같이 작은 박테리아보다 큰 자이언트 바이러스마저 발견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된 바이러스 종류의 60%를 넘나드는 RNA 바이러스는 물론 자이언트 바이러스들의 유전정보조차 지금껏 알려진 세포성 생물의 유전정보와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이 가설의 설득력은 매우 취약하다.

바이러스_img1 [그림2]
가설2 : 세포 탈출설

지구에 세포성 생명체가 먼저 태어났고, 세포 유전자 중 일부가 세포를 벗어나 자신의 복제와 증식에 필요한 효소나 구조단백질 유전자를 추가로 획득해 바이러스가 됐을 가능성이다. 여러 해 동안 비중 있게 받아들여졌는데, 바이러스가 예외 없이 숙주세포에 의존해 증식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는 세포의 출현 이후에 생겨났으리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세포성 생명체의 유전물질인 DNA가 원시지구의 ‘RNA 월드’이후에 진화된 것이고 오늘날 RNA 바이러스들이 고대의 자가복제 RNA 분자에서 기원했으리라는 과학적 믿음은 매우 크다. 만약 원시적인 RNA 바이러스가 먼저 존재했고 이후 생겨난 세포성 생물체에 기생하는 생활사로 전환했다면 탈출가설의 설득력은 쉬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탈출가설을 지지하는 간접 증거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사람의 CPEB3 리보자임과 유사한 유전정보를 가진 간염델타바이러스(HDV)의 리보자임 유전자다. HDV는 오직 사람에만 감염하는 바이러스이고 B형간염바이러스(HBV)가 도와주어야만 증식할 수 있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또 다른 증거는 바이러스의 방대한 생물학적 다양성이다. 만약 바이러스가 원시세계의 일부 조상으로부터 출발해 진화를 거치며 나누어진 것이라면 바이러스마다 이처럼 다양한 유전정보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즉, 방대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세포성 생명체로부터 다양한 유전자들이 긴 진화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세포로부터 탈출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역전사효소(RT)를 갖고 있는 레트로바이러스 그룹, 특히 RNA-의존성 RNA 중합효소(RdRp)를 갖는 RNA 바이러스 그룹은 숙주세포의 유전자와 비교해 유사점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 박테리아에서 진화한 고세균(Archaea)에는 RNA 바이러스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RNA 바이러스의 기원이 적어도 고세균 진화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들은 이 가설의 신뢰도에 중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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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3 : 독립 기원설

마지막으로 시원세포의 출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립 기원설’이다. 즉 바이러스는 세포성 생물보다 먼저 출현한 생명체의 후손이라는 견해로, 어쩌면 지구에서 세포가 처음 탄생하는데도 바이러스(또는 조상)가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보는 주장이다.

분자생물학적 분석 능력이 발전하면서 탄력을 받고 있는 이 가설은 오늘날의 RNA 바이러스, DNA 바이러스, 그리고 레트로바이러스 그룹이 각각 RNA, DNA, 그리고 RNA-DNA 전이상태의 시원 복제체(primordial replicon)들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피막형 바이러스의 고대 형태가 시원세포의 핵으로 기생하면서 최초의 진핵세포가 출현했을 것이라는 견해나 진화역사 초기에 나타난 ‘RNA 세포’가 RNA 바이러스의 숙주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이 가설과 유사한 입장이다.

바이러스의 독립 기원설을 지지하는 증거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보존된 유전자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 유전체의 복제효소를 구성하는 도메인 중 특정한 구조는 바이러스 종류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더 중요한 예는 정이십면체형 바이러스의 단백질 외피를 만드는 단위체가 거의 모든 바이러스에서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전자 염기서열이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들의 구조가 이처럼 비슷한 것은 바이러스의 독립 기원설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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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진화의 고향

바이러스는 화석 증거가 거의 없지만 최근 학자들은 여러 가지 접근법을 활용해 바이러스의 연대기를 추정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숙주생물의 계통수를 이용해 그 숙주에 감염하는 바이러스의 진화역사를 간접적으로 추정하는 방법이다. 이 접근법은 특히 DNA 바이러스 기원 연구에 유용한데 예를 들어 허피스바이러스와 그 숙주인 척추동물의 공통분기 시점을 추적하면 적어도 4억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 이 바이러스가 상당히 오래된 진화역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다양한 시점에서 채취된 바이러스 시료들의 염기서열이나 아미노산서열을 비교해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RNA 바이러스나 단일가닥 DNA(ssDNA) 바이러스 분석에 꽤 쓸모가 있다. 세 번째 방법은 숙주세포의 유전체에 삽입되어 남아있는 바이러스 유전물질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내생적 바이러스 유전물질은 레트로바이러스는 물론이고 일부 RNA 바이러스와 소형 DNA 바이러스의 사례도 확인되고 있어 앞으로 ‘차세대 염기서열 결정법’ 등을 활용한다면 매우 고무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_img5 [그림5]

그러나 하나의 기원 가설이 바이러스의 다양성을 모두 만족하기는 어렵다. 우주 또는 세상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어쩌면 생각해낼 수 없는 범위까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곳이다. 현존하는 바이러스들의 기원은 위에 소개한 가설들이 모두 합해진 형태이거나 혹은 그 외의 추정까지 더한 ‘다중계통’ 기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기본 전략은 모든 바이러스가 하나 같이 생물적 환경자원을 이용하여 증식생태를 이어간다는 점이다. 바이러스의 개체 증식전략이 세포성 생물체와는 완연히 다르다. 반면, 바이러스의 생존과 증식에서 나타나는 생물적 특성들은 세포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바이러스든 세포든 모두 동일한 유전정보의 언어체계를 사용한다는 점이며 지구 생물권을 공유해왔다는 점에서 필연적 공진화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 왔다는 것이다.

필자 소개 / 정용석

정용석 교수는 미국 텍사스-오스틴 대학 미생물학과에서 박사학위(바이러스학)를 취득하고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감염병리학을 연구하였다. 1995년 서울 경희대학교 생물학과에 부임한 이후 현재까지 면역학 및 바이러스학을 가르치며 RNA 바이러스의 감염 메커니즘과 수인성바이러스의 환경생태를 연구하고 있다. 한국미생물학회의 바이러스분과위원장과 대한바이러스학회의 평의원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국제바이러스분류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Taxonomy of Viruses) 한국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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