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④ - 뜻밖의 냄새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누리장나무

뜻밖의 냄새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누리장나무
누리장나무의 꽃과 똑같이 생겼으나, 빛깔이 전혀 다른 꽃누리장나무의 꽃 ⓒ 고규홍
여름에 꽃을 피우는 나무 가운데 누리장나무(Clerodendron trichotomum)가 있습니다. 위 사진의 꽃은 우리 산과 들에서 보는 누리장나무와는 색깔과 생김새가 다릅니다. 누리장나무와 같은 종류인 Clerodendrum bungei 라는 나무입니다. 꽃이 눈에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에 ‘꽃누리장나무’라고도 부르고, 서양에서 들어온 누리장나무라 해서, ‘서양누리장나무’라고도 부릅니다만, 아직 공식적인 우리 말 이름은 없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영광의 꽃(Glory flower)’이라고도 부릅니다.
꽃누리장나무의 꽃은 마치 수국처럼 가지 끝에서 소담한 공 모양으로 둥글게 모여 피어나는데, 꽃송이 하나하나는 수국의 꽃과 다릅니다. 꽃송이는 영락없는 누리장나무의 꽃입니다. 꽃잎이 다섯 개로 깊이 갈라진 모습이라든가, 가느다란 꽃술이 길쭉하게 휘늘어진 것까지 똑같지요. 누리장나무의 꽃이 흰색인데, 꽃누리장나무의 꽃은 짙은 분홍색이라는 점이 도드라진 차이입니다.
누리장나무나 꽃누리장나무는 모두 여름에 꽃을 피웁니다. 누리장나무가 8, 9월에 핀다고 돼 있는데, 꽃누리장나무가 7월부터 꽃을 피우는 걸 보면 개화 시기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는 지역과 기후에 따른 차이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누리장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독특한 냄새입니다. 하얗게 피어난 꽃이 예뻐서 가까이 다가서면 벌써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데, 그냥 고약한 정도가 아니라 심할 경우 구토가 날 정도로 고약합니다. 가장 냄새가 고약할 때는 나무에 잎이 나고 물이 오르는 봄입니다. 잎을 만지거나 문지르면 더더욱 냄새가 심하게 느껴집니다.
꽃누리장나무의 꽃에서는 누리장나무 꽃에서 나는 누린내가 나지 않습니다 ⓒ 고규홍
‘누린내’라고 할 만한 냄새인데, 이 냄새 때문에 ‘누리장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거죠. 나무나 꽃에서 나는 향은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기입니다만, 누리장나무처럼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나무들이 종종 있습니다. 식물학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인 타이탄 아룸(Amorphophallus titanum)의 꽃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서, 방독마스크를 착용하고 관찰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향기의 기억은 참 오래 갑니다. 특히 예쁜 꽃에 어울리지 않는 나쁜 냄새일 경우라면 더 심하겠지요.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제라늄 잎사귀에서 풍기는 냄새에 놀랐던 기억이 제게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도 그런 거겠지요. 누리장나무의 냄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누리장나무는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눈으로만 보는 게 좋습니다.
그런 선입견으로 이 꽃누리장나무의 꽃향기를 맡아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나쁜 냄새가 나리라 생각한 거죠. 그런데 돌아와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꽃누리장나무의 잎사귀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나지만, 꽃에서는 그와 달리 매우 좋은 향기가 난다고 돼 있네요.
제가 처음 누리장나무 꽃을 본 것은 강화도 철종외가 생가에서였어요. 생가 뒤란을 홀로 서성이다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은 뒤란의 관목 숲에서 하얀 색 꽃을 보고 무척 반가웠지요. 숲을 헤치고 들어가 나무와 수인사를 나누다가 바로 그 냄새 때문에 화들짝 놀랐어요. 아마도 우리 수목원의 꽃누리장나무를 볼 때에도 그 기억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던 듯합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그들이 펼치는 다양성은 사람의 생각을 늘 뛰어넘는다는 걸 향기로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글 고규홍 (http://www.solsu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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