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올

통합검색

찾기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건조

작성일 2011-12-07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건조

 

 

거북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지만 대부분 청소년은 거북선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는지, 이순신 장군이 사망한 전투는 무엇인지, 일본과의 해전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정도만 알고 나면 더는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막상 거북선을 직접 접하면 실망부터 하기 일쑤다.

 

우리나라의 최신군함인 독도함이나 세종대왕함, 심지어 미국의 항공모함까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학생들에게 거북선은 그 크기나 위용에서 현대적인 군함과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하기에는 선체 대부분이 목재로 되어 있어서 철갑선치고는 너무 초라해 보인다. 게다가 거북선이 임진왜란 초기(1392년)에 2척, 전쟁 막바지(1398년)에 이르러 5척 정도만 제작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거북선이 실제 전쟁에서 활약한 수많은 일화가 사실일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거북선이 초라해 보인다 할지라도 거북선의 의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때나, 지금 현재나 여전히 대단한 배기 때문이다.

 

충무공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거북선 그림 ⓒ 충무공이순신 기념관

 

 

거북선 건조는 과학기술의 우위

 

임진왜란 초기, 왜군에게 파죽지세로 밀렸던 지상군과 달리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압도했다. 당시 조선의 군사과학 기술이 일본에 앞섰지만, 고전적인 전술에만 의존하던 지상군과 달리 수군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거북선 건조와 거북선에 설치했던 화포(대포)가 바로 발전된 군사과학기술의 증거다.

 

고려 말 최무선이 명나라에서 화약을 도입한 후, 우리 선조들은 그 성능을 발전시키고 우수한 대포를 제조했다. 조선 초기부터 수군은 이미 화포를 군함에 설치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다. 최무선 장군이나 정지 장군은 이렇게 강화된 해군력으로 일본의 왜구가 침입해올 때마다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화포뿐 아니라 조선기술도 최첨단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거북선을 만들어 한강에서 실험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선 기술력을 보유했음에도 일본 왜구의 침입이 잦아 전투 중 손실이 누적되면서 조선의 강력한 해군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거북선이 한 척도 없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전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수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부터 부서진 전함을 수리하고 새로 판옥선을 건조하는 등 전쟁 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판옥선뿐만 아니라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거북선과 같은 특수한 전함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대용이라는 사람에게 거북선 건조를 지시했다.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킬 방법은 거북선처럼 특수한 배를 건조하여 결전병기로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노력 덕분에 임진왜란 발발 직전 2척의 거북선을 건조하여 바다에서 실전 연습까지 마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침략하던 일본의 배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선체의 무게는 가볍고 배의 밑바닥은 뾰족하게 만든 것인데, 이런 일본 배의 특징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통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일본 왜군의 주력 함정이었던 ‘안택선’은 병력과 무기, 그리고 식량과 같은 군수물자를 일본에서부터 싣고 와야 했다. 그리고 그때 해전의 방식은 배끼리 서로 달라붙어 전투요원이 상대방의 배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병사를 태우는 것이 유리했다.

 

이 때문에 안택선의 선체는 되도록 많은 물자와 병사를 태울 수 있도록 가볍게 제작했다. 그러나 조선의 배는 병사들끼리 직접 전투를 벌이기보다 화포를 활용한 전투를 주로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배는 화포를 발사할 때의 반작용에 견디기 위해 될 수 있으면 튼튼하고 무겁게 만들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조선의 배는 자연히 일본의 배보다 두꺼운 송판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배의 크기도 일본배보다 약 1/3 정도 크게 만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가볍고 작은 일본의 배보다 더 크고 튼튼한 조선의 배가 더 많은 기술력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못도 달랐다. 일본 배들은 쇠못을 사용하여 바닷물에 쇠못이 녹슬어서 선체가 금방 약해졌지만 조선의 배들은 바닷물을 머금으면 더욱 튼튼해지는 나무못을 사용했다. 그래서 판옥선이나 거북선이 직접 부딪치면 일본 배들은 쉽게 부서지곤 했다.

 

 

그림 2 각선도본에 등장하는 조선후기 조선의 전선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배의 밑바닥 형태도 조선의 배와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 배들은 속도를 중시했던 데다 대한해협을 건널 때 해협의 큰 파도에 침몰하지 않기 위해 배 밑바닥을 V자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방향을 바꾸려면 커다란 원을 그려야 했고 썰물이면 모래톱에 좌초되기 일쑤였다. 반면 조선 배들은 원양의 바다보다는 육지에서 가까운 연안에서 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배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평저선이어서 제자리에서 360도 방향전환까지 가능했다. 이런 배 바닥의 차이 역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과의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척 거북선으로 기선을 제압하다

 

16~17세기 해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처음에는 포탄을 주고받다가 접근하여 상대방의 배에 올라가 백병전으로 결판을 내곤 했다. <캐리비언의 해적들>과 같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실제로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배들은 화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배의 높이도 낮아서 일본 수군이 거북선을 불태울 수도, 거북선에 올라탈 수도 없었다. 거북선은 지붕에 금속판을 씌워서 불화살 공격에도 효과적으로 견딜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붕에 철침을 꽂아 놓아 일본군들이 지붕 위로 쉽게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3 1970년대 제작한 민족기록화 시리즈 가운데 한산해전도 모습 ⓒ 위키피디아

 

거북선의 활 쏘는 창이나 대포 쏘는 창들도 비상시에는 덮개로 닫을 수 있었는데, 덮개가 일본의 조총 탄환을 막아주어 승무원들을 보호해 주었다. 일본 수군이 공격해 올 때는 덮개를 닫아 두었다가 거북선이 다시 공격에 나설 때는 덮개를 열고 포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이처럼 거북선의 방어력이 높아 일본 배들 사이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공격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거북선을 보면 후퇴밖에 방법이 없었다.

 

조선 수군의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운 화포 기술은 고려 말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완전히 토착화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총통등록>이라는 기술 서적에는 화포 주조법과 화약 사용법이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조선군이 규격화된 화포를 대량으로 생산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나무 화살, 쇳조각, 쇠구슬을 화포로 발사해 적에게 타격을 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조정은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기술의 뒷받침을 받은 강력한 수군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삼도수군이 통제영 바다에 모여 첨()자 진을 펼치며 훈련하는 모습을 그린 병풍을 보면 당시의 해군력이 상상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병풍에 그려진 거북선만 세어 봐도 40여 척이나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왜구의 침략이 뜸해지고 바다로부터 위협이 줄어들자 조선 수군의 발전은 멈추고 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군사과학 기술과 수군의 우위를 스스로 포기해 버림으로써 조선의 해양력이 급속히 쇠퇴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거북선, 2층인가? 3층인가?

 

경상남도의 남해안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유적지는 물론이고 거북선이나 배를 수리하던 곳(굴강)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남해안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거북선을 복원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현재 해군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거북선은 <이충무공전서>라는 책에 나와 있는 설계도를 보고 건조한 것이어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이 아니라 그보다 200년 뒤에 건조된 거북선이라고 보아야 한다. 당시 거북선 크기는 가로 25m, 세로 10m, 높이 6m여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보다 큰 것으로 추측된다. 거북선의 노는 한쪽에 8개씩 모두 16개이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선장 1명, 장교 3명, 전투원 70명, 노잡이 70여 명 정도로 모두 15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림 4 외국의 화집에 나와 있는 거북선의 모습. 3층으로 추정된다. ⓒ 위키피디아

 

다행히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모습도 외국의 화집에 나온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거북선이 3층처럼 보이는데, 경상남도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을 복원하기 위해 3층 거북선을 건조하고 있다. 현재 전시 중인 거북선과 경상남도가 건조하는 거북선은 서로 다른 것일까?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된 거북선도 사실 3층으로 볼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의 거북선은 지하(창고와 침실), 지상(화포), 다락(거북선 앞뒤로 오가면서도 지휘하는 곳)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경상남도의 3층 거북선은 지하, 1층(화포), 2층(화포)의 구조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배와 항공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부 공간이나 설계가 바뀌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북선이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 구조가 약간 바뀐 것일 뿐, 거북선의 근본적인 형태가 바뀌지는 않은 것이다.

 

 

그림 5 2층과 3층 형태의 거북선 구조 비교 ⓒ 한국과학창의재단 / 작가 김화연

 

[교육팁]

임진왜란 당시 화포의 작동원리는 우선 화포에 화약(흑색화약)을 채워 넣은 뒤 철로 만든 철환을 넣은 다음 화약을 폭발시켜 철환을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즉 현대의 대포처럼 목표물에 맞아 포탄이 폭발하는 형태가 아니라 무겁고 둥근 대포알을 발사해 대포알이 가진 운동에너지로 목표물에 충격을 주는 원리다.

운동과 에너지를 다루는 법칙으로는 뉴턴의 제2법칙인 F=ma가 있는데 이를 적용하자면 ‘철로 된 포탄이 목표물에 충격을 주는 충격량은 포탄의 질량(m)에 포탄의 속도(a)를 곱한 것과 같다.’라는 말과 같다. 이 공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무게와 속도를 대입해 충격량을 계산해 보자

 

[교육 과정]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3단원 에너지와 도구

중학교 1학년 2단원 힘과 운동

중학교 3학년 2단원 일과 에너지

고등학교 1학년 2단원 에너지

 

글 /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교수 leefrance@hanmail.net

 

The Science Times
과학문화바우처
사이언스 프렌즈
STEAM 융합교육
CreZone 크레존
문화포털
과학누리
교육기부
EDISON
과학기술인재 진로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