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인쇄기술 혁신을 이뤄낸 주자소(鑄字所)

세계 최고의 인쇄기술 혁신을 이뤄낸 주자소(鑄字所)
늘어나는 서적 수요를 감당할 전문 인쇄소를 세우라!
고려 말 불교의 독보적인 지위가 흔들리며 성리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국교로 탄탄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분야의 학문에도 슬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식인 사이에서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한 것이 미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 서적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중시되지 않던 분야의 서적도 인기를 얻게 됐음을 의미한다. 당시 지식인이 찾는 서적은 주로 중국 등 외국에서 수입한 최신의 전문 서적과 백성을 일깨우는 자료 등이었다.
책의 종류가 다양해 이것들을 국내에서 편찬하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책을 발간하려면 책을 찍어내는 전문 인쇄소가 있어야만 했다. 인쇄 방식은 크게 금속활자인쇄와 목판인쇄로 나뉜다. 금속활자인쇄는 금속으로 미리 제작된 글자들을 조합해 책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반면 목판인쇄는 목판에 책의 내용을 일일이 새겨 한 쪽씩 한꺼번에 찍어내는 방식이다. 당대에는 금속활자인쇄보다 목판인쇄가 더 성행했다. 목판은 처음에 제작하기는 어렵지만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인쇄 방식도 단순하기 때문이다. 금속활자인쇄는 시간적으로 촉박한 상황에서만 임시수단으로 사용했다. 설사 활자로 서적을 인쇄했다 하더라도 여건이 마련되면 목판으로 다시 인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첨단 정보는 빠른 전달이 필수적인 법. 목판보다 제작 기간이 짧은 금속활자가 점차 번성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림 1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 위키피디아
예로부터 한국은 인쇄술의 선진국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갖고 있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조선왕조는 서적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태조1년(1392년) 서적원이 설치돼 책과 문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서적이 본격적으로 출간된 것은 태종3년(1403년)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 산하에 주자소가 발족되면서부터였다. 세종 17년(1435년)에는 서울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던 주자소가 경복궁 안으로 옮겨갔다. 세조 6년(1460년)에는 교서관(校書館) 산하로 소속을 옮기고 이름도 전교서(典校署)로 바꿨다. 정조 6년(1782년)에는 교서관이 규장각(奎章閣) 산하로 들어가 또 다시 이름을 감인소(監印所)라 바꿨다. 그러다가 정조 18년(1794년)이 되어서야 태종의 예에 따라 다시 본래의 이름인 주자소로 개칭됐다.천혜봉 교수는 주자소를 설립한 이유로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함)와 우문정책(右文政策, 무관을 무시하고 문관을 우대하는 정책)을 꼽았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적을 간행하고 보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인쇄술이 있었다. 세종 때에는 권학 풍조가 더욱 만연했다. 세종은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젊은 인재들을 뽑아 산에 들어가 책을 읽게 했을 정도다. 물론 그들의 생활비용은 모두 국가에서 부담했다.
더 빠르게, 더 균일하게
주자소는 전제군주제인 조선왕조에서 다소 예외적인 과정을 밟아 설립됐다. 국책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신하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나 주자소는 태종이 조선에 책이 없어 유생들이 공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직접 주자소 설립을 명했다. 하지만 당시 신하들은 주자소 설치를 크게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태종이 금속활자인쇄를 고집하며 그 동안 사용해오던 작은 활자(小字) 대신 큰 활자(大字)를 만들어 사용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태종이 원하는 활자는 과거부터 사용되던 가로 세로1.0센티미터(cm)의 것이 아니라 가로 1.4cm, 세로1.7cm짜리의 매우 큰 활자였다. 기존의 활자를 사용하지 않고 새로 활자를 만들려면 원료인 동(銅)이 많이 확보되어야 했다. 문제는 당시 조선에서 동을 거의 생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동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의 국토해양부 격인 공조(工曹)에서 나섰다. 궁중에 옷감과 의복을 제공하는 제용감(濟用監)에서 일본 상인과 포목과 동을 서로 교환했다. 물론 태종의 활자 제작 명령이 있은 직후 필요한 광물을 자급자족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재료를 확보하기 어렵고 경비도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주자소 설립을 반대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예상보다 거세자 태종은 주자소 설립에 필요한 비용을 국고에만 의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재를 털어 비용을 충당하고 모자라는 자금은 신하들이 제공토록 하며 태종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이로써 엄밀히 말해 주자소는 국책기관이면서 동시에 사설기관인 반관반민의 성격을 띄며 발족됐다. 주자소가 승정원의 산하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일꾼의 상당수는 왕궁 밖의 사람들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어정쩡한 위치는 세종대에 명실상부한 국가 기관으로 발족되면서 해결됐다.
그림 2 좌측부터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
계미자는 뒷면이 뾰족해 바르게 서지 않지만, 경자자는 직육각형 모양이어서 바르게 선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주자소는 설치되자마자 금속활자를 주조해 <경제육전(經濟六典)>, <십칠사(十七史)> 등 여러 책을 출간했다. 당시 사용한 활자가 유명한 계미자(癸未字)다. 계미자는 그 동안 주조된 활자보다 글자의 모양이 고르고 균일하다. 하지만 글자체가 크고 거칠며 활자 아래의 끝이 뾰족하다. 그래서 밀랍 바탕에 활자를 꽂아 판을 짜야만 책장을 찍을 수 있다. 그러니 자연히 인쇄량은 하루에 불과 몇 장에 밖에 미치지 못했다. 계미자의 문제점을 극복한 새로운 활자가 개발된 것은 세종 4년(1422년)의 일이었다. 이천이 김익정, 정초 등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경자자(庚子字)가 그것이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해 글자가 작고 정교하다. 그리고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들어 인쇄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계미자는 하루 인쇄량이 몇 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자자는 20여 장, 갑인자는 40여 장이었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 작가 김화연
조선시대에 인쇄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것은 활자의 개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활자의 재료에서도 인쇄기술의 발전은 확인된다. 금속활자의 재료를 새로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세종 18년(1436)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연으로 활자를 주조했다. 조선시대에 아연을 활자 재료로 선택했다는 것은 당시 기술자들이 아연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아연은 먹이나 잉크가 표면에 잘 녹는 장점이 있다.
세계 최초로 아연을 금속활자의 재료로 사용해 만든 활자는 병진자(丙辰字)다. 이것으로 주희가 쓴 중국의 역사서 <자치통감강목>을 인쇄했다. 병진자에서 주목할 점은 큰 활자는 아연을 넣어 만들고 작은 활자는 아연을 넣지 않고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기술자들이 활자의 크기에 따라 인쇄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형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큰 활자는 인쇄과정에서 생기는 높은 압력이나 기계적인 힘에 잘 견딜 수 있으나 작은 활자는 쉽게 변형되기 때문에 아연을 넣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1434년 갑인자는 구리 84퍼센트(%), 아연 3~7%, 납 5%, 무쇠 0.1%로 그 강도가 미국 해군의 대포에 사용되는 금속에 필적한다. 1455년의 을해자는 구리 79.45%, 아연 2.30%, 주석 13.20%, 납 1.66%, 철 1.88%로 제작됐다. 이후에 만들어진 활자에도 아연은 계속 발견됐다. 세계 학계에서는 아연이 들어간 활자를 현대 인쇄활자의 시조로 평가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금속활자뿐 아니라 아연이 포함된 활자의 발명국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관리
조선시대의 활자본에는 오자나 탈자가 별로 없고 인쇄상태가 정교하다. 활자 인쇄에 상당한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는 활자 인쇄에 관계되는 주자소의 장인과 인원수에 관한 규정이 있다. 주자소에는 정3품 아문으로 다른 관직을 겸임하는 판교(判校) 1명을 포함해 10여명의 관리가 있었다. 그리고 인쇄와 관련된 전문 장인 100여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장인들은 활자의 주조에서 책자 인쇄에 이르기까지 각 과정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주자소 관리들은 엄격한 처벌 규칙에 따라 인쇄의 질을 관리했다. 감인관, 창준, 수장, 균자장은 책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의 곤장을 맞고, 한 자가 더 틀릴 때마다 한 등씩 더 벌을 받았다. 인출장은 한 권에 한 글자의 먹이 진하거나 희미할 때 30대의 곤장을 맞고, 한 자가 더 할 때마다 벌이 한 등 높아졌다. 교서관원은 다섯 자 이상 틀렸을 때 파직되고, 창준 이하의 장인들은 곤장을 때린 뒤 50일의 근무 일자를 깎는 벌칙이 적용됐다. 이런 엄격한 규칙 덕분에 조선이 활자 인쇄에 관한 한 세계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기술발전사(4), 리조전기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6).
· 『조선기술발전사(4), 리조전기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6).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천혜봉, 『한국금속활자본』 (범우사, 2003).
· 이인식 외, 『세계를 바꾼 20가지 공학기술』 (생각의 나무, 2004).
· 최준식 외,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시공사, 2004).
· 유대군, 『조선초기 주자소 연구』 (한국학술정보(주), 2008).
· 문중양, “직지심체요절, 세계 금속활자 인쇄술 역사의 시작”, 『뉴턴』, 2004년 5월호.
· 노태천 외, “여말선초 청동활자의 주조기술에 대한 실험연구”,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제1권 제1호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 1994).
[교육팁]
용융점이란 무엇인지 조사해보고, 금속활자를 구성하는 성분 원소들의 용융점을 알아본다.
- 용융점은 고체의 물질이 액체상태로 변화할 때의 온도를 말한다.
- 금속활자를 만들 때 금속 물질에 높은 열을 가해 액체로 녹인 후 식혀 활자의 모양을 만든다.
- 여러 가지 금속이 섞여 있을 때 열을 가하면 용융점이 낮은 금속부터 액체로 상태변화 한다.
- 금속활자의 성분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구리의 용융점은 1,084도이다.
- 연활자를 만드는 납의 용융점은 327.4도이며, 아연은 419도이다.
[교육과정]
- 초등학교 3학년 우리생활과 물질
- 중학교 1학년 물질의 세가지 상태
- 중학교 3학년 물질의 구성
글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국내장기전문가·과학저술가 mystery123@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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