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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으로 불침항모를 만들어라!

작성일 2012-03-26

얼음으로 불침항모를 만들어라!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영국 해군은 절대 가라앉지 않는 불침 항공모함, 그것도 아주 거대한 항모를 꼭 갖고 싶어 했다. 영국은 대전 초반 독일 잠수함인 U보트의 공격으로 국내 경제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상선 단이 고사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당시의 잠수함은 디젤 잠수함이라 색적시에는 부상항해를 하다가 목표에 은밀히 접근해야 할 때나 적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야 할 때만 잠항했다. 따라서 항공기에 의한 대잠공중초계를 철저히 한다면 먼저 발견해 대책을 취할 수 있는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영국은 상선 단에 그만한 대잠초계를 해 줄 항공기 전력과 항공모함이 부족했다. 게다가 계속 격침당하는 상선을 보충하기에만도 정신이 없는 영국 조선소들에 항공모함까지 뽑아낼 여력은 없었다.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강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영국의 합동작전본부에 근무하던 민간인인 제프리 파이크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철이 없으면 얼음으로 배를 지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얼음은 같은 무게의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1%만 있으면 생산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항공기가 이착륙하는데 충분한 내구도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자연 빙산을 고쳐 활주로와 격납고를 내거나, 또는 아예 그런 시설을 갖춘 빙산을 인공적으로 만들면 대서양 위에서 U보트를 상대하는 떠다니는 항공기지로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물의 어는점은 섭씨 0도라 그 이상 온도가 올라가면 녹게 된다. 얼음으로 배 모양을 만든다고 해도 6개월도 못 갈 것이다. 설령 날씨가 추워 녹지 않는다 하더라도 북극에 면한 북대서양에서 볼 수 있는 빙산은 보통 산 모양을 하고 있다. 이래서는 비행장으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배와는 달리 물 위로 드러난 부분이 물속에 잠긴 부분에 비해 턱없이 작으며, 바다 상황이 나빠지면 쉽게 기운다.

 

하지만 파이크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가 직접 발명한 파이크리트라는 신소재가 그것이다. 물에다가 목재펄프를 4~14% 혼합, 젤 모양의 반유동체로 만들고 그 혼합물을 원하는 모양의 틀에 넣어 얼리면 만들어진다. 이누이트 족이 얼음 썰매에 이끼를 집어넣어 강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발명한 이 물질은 통상적인 얼음에 비해 내구성, 그리고 녹는 속도 면에서 매우 우수하다. 가로세로 50cm의 파이크리트 블록은 권총 사격에도 깨지지 않았으며, 섭씨 20도에서도 무려 2달 동안이나 녹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얼음이니만치 물에 뜬다. 바로 이 물질 덕택에, 해사 사상 전무후무한 ‘얼음 항공모함’ 계획인 하박국(Habakkuk) 계획이 1942년 탄생한다.

 

설계도면으로만 끝난 영국의 얼음 항공모함 하박국.

 

계획 명으로 사용된 하박국은 성서의 예언자이자, 그가 쓴 구약성경 하박국서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이 쓰인 것은 이 계획의 목표가 워낙 원대했기 때문에 완성될 시 하박국서 1장 5절의 이야기처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라는 믿어지지 않는 결과가 나올 거라는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박국 계획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앞서 말한 파이크리트를 주재료로 하여 길이 600m, 너비 90m, 배수량 220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건조한다는 것이다(참고로, 2차대전의 가장 거대한 항모인 일본의 시나노도 배수량이 7만 톤 ‘밖에’ 되지 않았다). 파이크리트 블록으로 마치 얼음집을 만들 듯이 거대한 선체를 만든 후 이에 항공기 운용과 항해에 필요한 설비를 넣는다. 추진은 선 외 모터 13대를 통해 이루어지며, 항속거리는 11,000km이었다. 파이크리트 벽은 어뢰에 피격당해도 무사할 수준의 강도를 확보하기 위해 12m 두께로 만들어질 계획이었다. 그리고 함재기로는 경폭격기 100대, 전투기 200대가 탑재될 예정이었으며, 탑승 승무원 수는 1,600명이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파이크리트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얼음이었기 때문에,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선체 소모에 대비, 선체 외벽은 파이크리트가 아닌 단열재와 목재이다. 그리고 자체 냉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만에 하나 선체가 파손되더라도 외부의 물과 펄프를 섞어 얼리면 복구가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개발팀은 하박국의 설계개념을 실증해 보이기 위해 캐나다의 패트리샤 호수에 파일럿플랜트를 만들고 1,000톤 규모의 하박국 축소모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하박국의 운명은 여기에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파이크리트는 블록 상태에서는 물에 떴지만, 그걸로 배를 만들어보니 배 갑판의 높이가 수면 높이와 거의 차이가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파이크리트 소재의 항해 중 변형 문제도 뜻밖에 심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보강용 철근과 외부 단열재를 더욱더 늘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건조비용도 애당초 예상했던 70만 파운드에서, 250만 파운드로 훌쩍 올라 버렸다. 당시 영국 돈 250만 파운드면 요즘 우리 돈으로 2,000억 원이 좀 넘는 엄청난 액수이다.

 

결국, 1944년 이내에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하박국의 완성은 하염없이 미뤄지게 되었고, 이러는 와중에 독일 U보트는 이미 1943년 봄을 전후해 미국의 대잠전력 강화와 독일군 암호해독 때문에 대서양에서 꼬리를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맞서 싸울 적이 없게 된 하박국 계획은 제대로 완성되지도 못하고 폐기되고 만다.

 

만약 하박국이 완성되었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항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만들어졌으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지난 2009년 4월 15일 디스커버리 채널의 TV 프로그램 <미스버스터>에서는 목재펄프 대신 신문지를 첨가한 파이크리트를 사용해 배를 만든 후, 이걸 타고 알래스카 앞바다에서 시속 40km로 항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파이크리트로 이루어진 배, 그것도 항공모함이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는 출연자들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2010년에는 영국의 BBC 채널의 프로그램 <이론이 펑>에서도 파이크리트 배를 만들어 포츠머스 항을 출발, 솔렌트를 거쳐 코웨스로 가는 항해를 시도했지만, 여기선 뭐가 잘못되었는지 떠나자마자 배가 녹기 시작해 결국 포츠머스 항을 나가기도 전에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글: 이동훈(과학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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