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학인당 ① - 소리를 감싸 안아 공연장이 된 한옥

전주 학인당 ①
소리를 감싸 안아 공연장이 된 한옥
“이-리 오너라 업고 노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소리꾼의 목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진다. 가야금, 대금, 태평소 소리가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관람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숨을 죽이며 공연을 감상하는 이 곳은 공연장도, 야외무대도 아니다. 바로 ‘집’ 안이다.
‘은진공 10세손 樂中종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곳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학인당學忍堂’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자 민가 중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곳이다. 본채가 1908년에 건립됐으니 벌써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다른 몇몇 고택들이 그렇듯, 학인당 역시 관광객들이 고택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숙박 공간으로 개조됐다. 하지만 단지 ‘숙박’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숙식 해결은 물론 집안에서 공연도 감상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공간’이다. 대청에서 벌이는 정식 공연인 ‘학인당 국악제’는 올해로 3년을 맞았다.
대청 왼편 큰방의 팔분합 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모두 열었을 때의 모습.
ⓒ 한국과학창의재단
학인당은 착공 당시부터 소리를 위해 설계된 집이다. 건립주인 백낙중은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국악과 소리를 아꼈다고 한다. 때문에 초기 건립부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곳곳에 심어놨다. ‘공연장’ 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리의 울림이다. 공연장에서는 집에서 TV로, 혹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널리 울려 퍼지는 소리는 감동을 배가시킨다. 그렇다면 이런 소리의 울림을 위해 학인당에는 어떤 건축방법이 사용됐을까?
평상시 응접실로 쓰이는 대청은 공연이 잡히면 약간의 ‘변신’을 한다. 대청에 들어서 왼쪽 벽은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지만 공연장으로 변신하면 팔분합들어열개문여닫이문이 접혀서 위로 들어 올려지고, 팔분합창호지문미닫이문은 양 옆으로 활짝 열린다. 대청과 큰방이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지는 것이다. 소리가 울릴 공간이 또 한 번 확보되고, 더불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대청의 천정도 다른 한옥에 비해 확연히 높다. 대청을 7량 구조의 연등천정으로 구성해 높은 층고건물의 층과 층 사이의 높이를 지닌 것이다. 또 대청 전면과 후면에 유리사분합문을 설치해 마루와 공간을 나눴다. 평상시에는 손님을 맞는 장소로 사용하고 공연 시에는 문지방을 분리해 문턱을 없애서 공연장,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대청의 높은 천정과 일반 한옥보다 폭이 좁은 나무 널판이 촘촘이 깔린 마루 바닥.
ⓒ 한국과학창의재단
흔히 음향의 질은 소리 크기, 소리 음역대, 잔향殘響 세가지로 평가한다. 잔향은 소리가 울리다가 그친 후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를 말하는데, 이 소리는 실내 음향효과를 내는 데 중요한 요소다. 학인당에도 이를 위한 장치가 있다. 대청 전면과 후면 윗부분을 보면 높은 천장에 비해 유리문이 양옆의 방문 윗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결과적으로 위로 퍼지는 소리가 나가는 것을 막아줘 잔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마루 바닥을 메운 나무 널판은 일반적인 한옥보다 폭이 좁다. 때문에 나무의 뒤틀림이 적고 빈틈 없이 촘촘하다. 소리가 빠져나갈 틈을 줄인 것이다. 널판의 두께도 10cm 이상으로 두꺼운데, 이 역시 소리의 진동으로 인한 떨림을 줄이기 위해 계산된 것이다.
방문에 발린 한지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흔히 ‘숨을 쉬는 종이’라고 표현하듯, 한지는 공기가 잘 통해 천 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한지는 한 겹일 때와 두 겹일 때 소리의 울림이 다르다. 소리를 반사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현재 학인당은 문 마다 한지 4겹을 바른 4배접을 하고 있다. 이렇듯 학인당 대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음향장치’가 된다.
이렇듯 건물에 자신의 의지를 표현해 낸 건립주 백낙중은 고종황제를 따르던 인물로, 전주 완주지역에 인제농장을 운영하던 부농이었다. 그는 1905년 장자 백남혁이 태어나던 해, 그의 부친 백진수가 물려준 492평의 대지에 새로운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수백 년 대를 이어 물려줄 저택을 택한 것이다. 이를 위해 주변의 땅 1,500여 평을 사들여 총 2,000여 평의 땅에 학인당을 짓기 시작한다. 당시 고종황제의 측근 무관이던 백낙중의 둘째 형, 백남신의 도움으로 고종황제의 허락을 받아 궁중의 일류 목수들을 공사에 투입했다. 그 영향으로 학인당 곳곳에서 궁중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네모난 모양이 아닌 원형으로 깎여 있는 기둥이나 그 기둥 밑을 받치고 있는 초석이 원형으로 깎여 있는 모습 등이 있다.
건물 구조는 궁궐양식의 형태를 취했지만 전반적으로 학인당의 구조는 개화기의 근대한옥 중 개량형 한옥이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사대부 양반가의 한옥은 건물 외면에 문이 없고 바로 툇마루에 앉을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학인당은 건물 외면에 유리로 된 여닫이문이 있다. 이 문은 채광과 환기의 기능은 유지하면서 바깥의 공기를 막을 수 있어 겨울엔 찬바람을 막아주는 역할, 여름엔 무더운 바깥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내부 생활공간의 배치도 양옥의 형태를 따른다. 서재나 세면장, 목욕탕, 화장실 등을 내부에 설치하고 마루로 연결해 동선의 편리함을 추구했다. 한옥의 주재료인 목재는 압록강과 오대산에서 최고급으로 구해왔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쌀 4,000석이 들었다니, 학인당 건축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궁중양식이 상용된 둥근 기둥과 초석의 모습.
ⓒ 한국과학창의재단
학인당은 잘 꾸며진 정원, 연못으로도 유명하다. 연못 오른편을 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땅샘’이 나온다. 물 맛 좋은 이샘은 건축 당시 우물이었던 자리에 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한여름에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냉장고 대용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학인당에 위기도 있었다. 1970년대 모그룹에서 3억 원을 제시하며 해체를 요구했는데, 당시 종손이었던 백남혁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학인당을 건립한 부친의 뜻을 되새기며 이를 거절했다. 1974년에도 민속촌을 짓는다고 해체와 이전을 요구했지만 백남혁은 금전의 유혹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위해 1975년 자청해서 문화재 지정 서류를 제출해 1976년 4월 지방문화재전북민속자료8호로 지정받았다. 학인당이라는 당호 역시 백남혁이 부친을 기려 후손들에게 선대의 후덕과 효심을 배우라는 의미에서 백낙중의 호 ‘인제’의 가운데 글자를 넣어서 지은 이름이다.
학인당은 건립 이후인 조선 말기부터 해방 전까지 전라북도에서 문화교류의 장으로 활용됐다. 또한 예술인들의 공연과 교류의 장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공산당도당위원장이 불법으로 점거해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백범 김구선생 등 정부요인이 전주 방문 시 숙소로 사용하는 등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소다. 학인당은 10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건립자의 후손이 거주하며 꾸준히 관리하는 것은 물론, 초기의 건립 목적도 잊지 않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 전통가옥 중에는 관객 수와 상관없이 매일 공연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학인당의 당주堂主인 백창현 선생 역시 국악을 살리고 널리 알리기위해 매일 공연을 꿈꾸고 있다. “한국의 오페라를 보여주고 싶다”는 당주의 바람처럼 학인당에서 국악공연소리가 끊이지 않을 날을 기대해 본다.
한국과학창의재단 <고택 속 숨은 이야기와 전통과학> 연재
- 다음
- 전주 학인당 ② - 한옥,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빚어내다 2012.03.23
- 이전
- 보은 선병국 가옥 ② - 수백 년 고택을 떠받치는 든든한 힘, 기둥 201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