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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연구실] 과학계의 엄친아, 라이너스 폴링

작성일 2013-09-16

모든 것을 가져서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만한 사람을 농담으로 '엄친아'라고 부른다. 역사상 위대했던 과학자들은 어딘가 결함을 지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20세기 초중반은 역사상 가장 급격한 과학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진 기간이자 엄친아도 많이 탄생한 때였다. 이 때 등장한 과학계의 진정한 엄친아 중 한 명이 바로 라이너스 폴링이다.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 오늘날 양자화학의 기초지식은 그가 체계화한 것이다. ⓒwikipedia

 

폴링은 개인 자격으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자 미국인이면서도 소련의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다. 현재 고등학교 화학에서 배우는, 오비탈을 이용하여 화학결합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폴링의 주요 업적 중 하나다. '양자화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 아이디어를 떠올려서 구체화했을 때가 20대 때였으니 젊을 때부터 천재적인 실력을 보였던 셈이다. 노벨화학상은 어쩌면 시간문제일 뿐,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1960년, 올해의 인물 타임지 표지. '미국의 과학자들'이었으며 폴링은 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폴링에게 또 다른 노벨상을 안겨준 업적은 다름아닌 반핵운동, 반전운동이었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폴링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온 몸으로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로서 사회와 인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 매카시즘 열풍이 불었을 때 오펜하이머와 함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세계적인 핵실험 반대 운동을 벌여 1만명이 넘는 과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63년,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러나 노벨평화상은 엉뚱한 방향으로 폴링에게 족쇄가 되기도 했다. 정확히는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유진 매카시가 폴링의 커리어에 오점을 남기게 만들었다. 왓슨과 크릭의 발견으로 잘 알려진 DNA 분자구는 사실 폴링이 먼저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화학계에서는 분자간 결합에 관한 한 폴링이 최고 권위자였으므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폴링이 제일 먼저 DNA 구조를 발견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폴링이 갖고 있던 DNA 시료가 손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시료로 제대로 된 모델이 나올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모델이 나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폴링은 아예 혼란에 빠져버렸다. 이 시료의 분자구조를 DNA이 일반적 성질을 유지하면서 묘사해낼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는 자신이 세운 이론을 위배해가면서까지 무리하게 만들어낸 모델이 지금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삼중나선 구조였다.

 

 

폴링이 자신의 논문에 수록한 3중나선 구조. 지금 보면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더 큰 문제는 매카시즘의 광기에 몰려 출국금지를 당하는 바람에 미국 밖에서의 학술대회에 전혀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참석할 수 있었다면 폴링의 지위로 보아 다양한 시료와 X선 회절사진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시료의 문제를 알아채고 제대로 된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왓슨과 크릭이 정확한 모델을 발표한 후, 폴링의 DNA 모델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노벨상을 받은 후 왓슨과 크릭은 간이 튀어나왔는지 자신들이 쓴 책에서 DNA 분자구조를 밝히려 노력한 사람들을 조롱했는데, 여기에는 폴링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양권의 기준으로 보면 몹시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었지만 폴링은 너그럽게도 이들을 파티에 초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일깨워준 데 대해 감사해했다.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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