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연구실] 러시아 로켓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룔로프

1964년 11월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첼로메이 대신 그의 경쟁자였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들어서서 본격적인 달착륙계획을 수립했다. 이전까지 소련의 우주계획은 첼로메이의 UR-500로켓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달착륙 계획에 착수하자마자 코룔로프는 UR-500보다 훨씬 강력한 N1로켓 개발을 서둘렀다. 소련은 미국보다 2년이나 늦게 달착륙방식을 결정했고, 예산도 적었다. 더욱이 NASA와 같은 강력한 중앙조직도 없었다. 따라서 26개의 관련 정부기관과 5백여곳의 조직을 일원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소련의 초기 우주계획을 책임졌던 코룔로프(오른쪽)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미국이 세운 아폴로계획과, 코롤료프가 소유즈 캡슐을 변형해 만든 달착륙선 루나가 참으로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소유즈 캡슐이 당시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제안한 아폴로 캡슐의 설계도를 빼돌려 제작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행과정도 같았다. 먼저 달궤도선을 이용해 승무원을 달궤도에 진입시킨 후 승무원 중 일부가 달착륙선에 옮겨 탄 후 달 표면에 내린다. 임무가 끝나면 다시 달궤도선으로 돌아와 이를 타고 지구로 돌아온다. 다만 차이는 미국은 3명의 우주비행사를 보내 2명이 달에 착륙하지만, 소련은 2명의 우주비행사를 보내고 1명만이 달에 착륙한다는 것.
두 나라가 모두 하나의 우주선으로 달에 직접 착륙하는 방식보다 다소 복잡한 ‘달궤도 랑데부’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궤도선은 지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대기 재돌입 캡슐로서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반면 달착륙선은 공기가 없는 달 표면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므로 공기역학적인 고려를 할 필요가 없다. 또 단계마다 사용 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무게를 극한까지 줄일 수 있다.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성공하려면 랑데부와 도킹, 우주선 밖을 나가는 우주유영, 달궤도 비행 등의 우주기술이 확보돼야 한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기술이었다. 미국은 이런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2인승 제미니를 마련했고 소련은 2인승 보스호드와 소유즈를 마련했다.
보스호트 2호는 최초의 우주유영을 성공시키는 성과를 냈다. 문제는 미국이 최초는 놓쳤지만 전체 계획상으로 더 앞서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진은 인류 최초로 우주를 거닐은 알렉세이 레오노프. ⓒWikipedia
사실 유효타는 먼저 날렸지만 달착륙에 이르기까지 소련은 미국보다 갈 길이 멀었다. 보스호드 2호로 우주유영기술 한가지만 확보했고 나머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우주선 발사는 기술적인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다. 1965-1966년 동안 미국은 제미니 3-12호를 이용해 9번의 유인우주비행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데 비해, 소련은 단지 보스호드 2호만 발사했을 뿐이다.
결정차는 코롤료프의 사망이었다. 코롤료프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고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던 '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였다. 2차대전 승전으로 얻은 V-2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조국이 미국보다 늘 한 발 앞서 있게 했던 주역이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미국의 새턴-V(왼쪽)과 소련의 N1(오른쪽). 비록 달 착륙 경쟁에서는 졌지만 코룔로프가 기반을 닦은 N1은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현재도 러시아 우주계획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Wikipedia
손실은 결정적이었다. 코롤료프가 개발하던 N1 로켓은 후임자들이 넘겨받아 개발을 지속했으나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제대로 크지 못하고 발사에 실패하고 만다. 아폴로 11호가 출발하기 불과 13일 전에 두 번째 N1 로켓이 발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200m도 채 오르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정홍철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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