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독일 대학생활, 실험 수업(랩 코스)의 이모저모

[새로운 시작 앞에서]
친애하는 게일 교수님께,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학기에 《고급물리학 실험》 과목을 수강하려고 하는 한국에서 온 보람이라고 합니다. 졸업 요건 중 전공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 《고급물리학 실험》 교과목에 대해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 연락 드렸습니다. 한국에서 학부 과정을 거치면서 졸업에 필요한 실험 교과목은 모두 이수했지만 독일의 실험 교과목은 공부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홈페이지에 기재된 빈틈 없는 학습 내용을 살펴본 결과 제가 이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저와 같이 벽을 느끼는 학생을 위해 이 과정을 잘 알고 계신 교수님께 약간의 조언을 얻고자 합니다. 바쁘신 중에 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존경을 담아,
보람.
보람 학생에게,
먼저, 학생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이해합니다. 이와 관련해 이번 학기부터 《고급물리학 실험 준비》 교과목을 개설했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세미나실에서 실험 수업에 참가하는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오리엔테이션과 안전교육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고급물리학 실험 준비》 교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별도로 프로그램 안내를 할 예정이니 꼭 참석해 정보를 얻어 가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유명 대학 중 하나인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풍경
입학보다 졸업이 더 어렵다고 말하는 독일 대학에 대한 평가들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학습에 대한 부담감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과가 3년제 과정임에도 학생들은 보통 4년 동안 공부하고, 그중에는 이를 넘어 5년이나 6년을 다니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을 볼 때 ‘독일 대학교의 학습량이 얼마나 많으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독일의 많은 대학에서 자연과학 또는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랩 코스’라 불리는 실험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물론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도 상당한 수준과 학습량의 실험 과목이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독일의 실험 과목들은 교과과정 기획을 볼 때 곧바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학생들을 올려놓겠다는 의지가 바탕에 내재하여 있어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은 ‘악명 높은’ 교과목으로 여겨진다. 특히, 내가 석사 과정을 밟은 베를린 자유대학 물리학과에서는 학기마다 1/3 정도의 학생들이 전공 필수과목인 《고급물리학 실험》 교과목을 패스하는 데 실패하여 끝내 학교를 옮기거나 자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러한 악명 덕분에 입학과 동시에 학교에서는 해당 실험 교과목이 ‘만만치 않음’을 알리는 이메일을 발송하고, 이와 함께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개설된 과목으로 《고급물리학 실험 준비》 과목이 개설되어 있음을 공지했다.
▲제출한 프로토콜에 대한 조교의 피드백이 잔뜩 쓰여있다 (좌) 보고서 제출 이후 조교와 함께 결과에 대해 논의하면서 사용한 메모보드 (우)
[독일의 랩 코스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랩 코스는 학사 과정과 석사 과정이 다르게 구성되고 있다. 대체로 학사 과정은 정해진 학사 정규 교과과정에 맞게 진행된다. 다만 한국에서는 《일반물리학》 교과목이 대체로 두 학기 과정으로 끝나지만 독일에서는 3~4학기에 걸쳐서 진행되므로 실험 교과목도 그에 맞추어 진행된다. 독일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괴팅겐 대학교의 물리학과에서는 모든 학생이 4학기 동안에 총 31개의 실험을 수행해야 한다. 이때 수행해야 하는 실험들은 대체로 《일반물리학》 수업과 진도가 맞물리도록 짜여 있어 이론으로 배운 내용을 실험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실험 교과목을 수강할 때 대체로 ‘예비 보고서’라고 하는 해당 실험에 필요한 사전 지식과 어떤 실험을 수행할지에 대해 기술하는 짧은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다음에 해당 실험 과정이 종료되면 실험 결과를 분석한 ‘실험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후 3일에서 7일의 시간이 지나면 학생이 제출한 실험 결과 보고서에 짧은 코멘트와 함께 점수가 매겨진 것을 받아볼 수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예비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험을 수행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후 실험 보고서를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학교마다 실험 규정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실험 보고서가 ‘완벽한’ 수준이 될 때까지 교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베를린 자유대학교는 두 차례의 수정까지는 허용되었지만 세 번째 수정에서도 보고서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고 다른 추가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괴팅겐 대학교는 수정 횟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지만 ‘완벽한’ 수준이 될 때까지 담당 조교와 끊임없이 보고서를 주고받아야 하며, 조교가 이 학생의 보고서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면 그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통보할 수 있는 엄격한 체제로 설계되어 있다.
보고서의 교정 과정은 단순한 오탈자 수정 지시뿐만 아니라 실험 과정을 기술하고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과를 도출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점을 논리적으로 기술하고 있는지를 일괄적으로 살펴본다. 이와 함께 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을 언급할 때 학생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이나 그래프 또는 표가 적절한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는지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학생들이 이러한 모든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고서를 최종적으로 제출한 이후에는 해당 실험의 담당 교수와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는 해당 실험을 통해 어떤 경험을 했고 무엇을 배웠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며,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실험 과목이 종료된다.
이 밖에도 대학교와 학과에 따라 예비 보고서를 제출한 뒤에도 1~2회 교정 과정을 거치거나 실험 전에 담당 조교와 실험 내용에 대해 구술시험을 본 후 합격한 그룹에 한해 실험을 수행할 기회를 주도록 규정한 곳도 많기 때문에 가히 ‘살벌한’ 교과목이 아닐 수 없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에 잔뜩 겁에 질려서 얼굴이 하얘진 채 《고급물리학 실험 준비》 과목의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참석했는데 나 외에도 다른 두 명의 학생이 더 있었다. 그래서 수업의 진행 방식과 궁금한 부분들을 좀 더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무심코 “이 과목 하나 때문에 졸업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니 ... 그럼, 실험 과목을 조금만 더 쉽게 바꾸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질문을 했다. 이에 게일 교수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단정하게 빗은 갈색의 곱슬머리를 벅벅 긁었다.
잠시 침묵하던 교수님은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건 우리가 바라는 목표가 아니에요. 실험 교과목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과목 중의 하나이고, 우리는 이 과목을 통해 학생들이 ‘진정한 연구’를 경험해 보기를 바라고 있어요. 실제 연구는 우리가 이 과목을 운영하는 방식과 비슷해요. 연구자는 무엇을 연구할지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찾아서 공부하며, 동시에 다양한 방법을 비교해 최선의 방식을 찾아내야 합니다. 또 실제로 실험을 했더라도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가장 적당한 방법을 찾아 직접 수행하고, 그 결과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까지가 연구자에게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게일 교수님의 단호하지만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랩 코스가 어떤 목적으로 기획되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독일의 많은 대학이 학생들의 저조한 졸업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까다롭고 번거롭기까지 한 이러한 수업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는 데에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야만 ‘잘 훈련된’ 연구자가 탄생할 수 있다는 독일 대학들의 신념이 바탕에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햇병아리가 장닭이 될 때까지]
독일의 랩 코스는 배우는 학생들도 빠듯하고 힘들지만 가르치는 조교나 교수진에게도 많은 준비와 시간 투자가 필요한 교과목이다. 독일 대학들은 실험 과목에 투자해야 하는 많은 자원을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다. 학사 과정의 랩 코스는 해당 과목을 이수한 경험이 있고 졸업을 목전에 둔 졸업반 학생들과 석사 과정 학생들이 조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조교로 참석하는 학생들은 추가 학점을 얻거나 이력서에 교육과 관련된 이력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에 조교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또 실험 수업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졌던 학생들이 종종 단순하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실험 교과목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수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교로서 실험 교과목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회의를 하면서 학생 지도 과정에서 경험했던 갖가지 내용을 공유하고, 교육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태도나 방식에 대해 교육을 받기도 하면서 학생 위치에서 조교로서의 입장 변화를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된다.
이렇게 학생으로서뿐만 아니라 조교의 위치에서 실험 교과목을 마주하게 되면 지도했던 실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교육자의 위치에서 실험 교과목을 되짚어 보면서 좋은 교과목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올해 초에 괴팅겐 대학교 물리학과 학생자치위원회는 랩 코스 실험 중 ‘전자회로 설계’ 실험에 대해 기대와 달리 많은 학생의 불만을 접수받게 되어 이와 관련된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랩 코스에 있는 ‘전자회로 설계’ 부분에 대한 논의였다. 전자회로 설계 실험은 대체로 간단한 동작을 하는 회로를 주고 그 회로를 직접 구현하는 방식을 통해 실험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장비가 상당히 많고 복잡하며, 때로는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는 ‘동작했다’는 것만으로 실험을 마치는 것이 부지기수인 수업이다. 그래서 학교 측은 이 실험을 빠르게 수행하기 위해 학습용 키트를 구입해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논의에서 많은 학생이 이러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수업에 참여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학생은 전자회로에 들어가는 저항이나 콘덴서와 같은 실제 부품들을 손수 만지고 조립하며 연결해 보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그 과정을 통해 더 많은 학습 경험을 쌓고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한 것이다. 이 논의 과정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학생들이 이 모든 과정에서 자신들의 학습 경험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물론 또 다른 많은 학생들은 적당히 게으르게 공부하는 방식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학생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이는 데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최고의 연구는 어디서 탄생하는가]
“안녕하세요. 제가 미세유체역학 실험 담당 조교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일찍 등교하여 토끼 눈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내가 맡은 《미세유체역학 실험》은 학사 3년 차 학생 중 석사 과정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학생들이나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는 과정으로 학생들은 수많은 실험 중에서 관심 있는 실험을 선택해 수강한다. 나는 그중 미세유체역학 시스템을 직접 만들어 간단한 실험을 수행하는 실험인 《미세유체역학 실험》과 이 모든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는 《미세유체역학 시뮬레이션》 과목의 조교를 맡게 되었다. 미세유체역학의 실험 과목과 시뮬레이션 과목을 모두 맡아서 가르치면 그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교수님의 특별한 배려 덕분에 한번에 두 실험 과목을 맡아서 진행하느라 진땀이 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새로이 마주하는 여러 아이디어와 문제점은 현실의 연구 활동에 큰 영감을 준다. 이번 학기부터는 교수님의 제안으로 그룹의 다른 사람들과 다음 학기부터 제시한 새 실험 과목을 개발하는 과정에도 종종 참석하면서 랩 코스의 새로운 면면을 또 살펴보고 있다.
▲실제 연구가 이루어지는 실험실과 똑같이 준비되어 있는 미세유체역학 실험이 진행되는 전용 실험실
독일의 랩 코스는 분명 까다로운 운영 방식과 학생과 조교, 교수의 수고스러움에도 독일의 많은 대학교와 학과들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관리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과정이 교수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주도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수업을 듣는 입장에서부터 수업을 진행하는 입장, 그리고 교과목을 개발하는 입장까지 모두 경험해 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기초 지식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연구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긴 학업 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지 성적표에 ‘○○○ 실험 과목을 이수함.’이라는 단 한 줄이 적혀 있겠지만 그 한 줄 안에 담겨 있는 경험의 깊이가 5년 후, 10년 후의 삶의 결에 미치는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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