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 유럽 방사광 연구소 연구일기


[ESRF, 유럽 방사광 연구소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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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리옹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남쪽으로 이동을 하면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작은 도시 그로노블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방이 알프스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 덕분에 고개를 돌릴 때마다 만년설을 감상할 수 있다. 그로노블에는 산자락에 자리잡은 요새와 ‘버블’이라 불리는 요새를 오르는 동그란 케이블카가 있어 유럽 내에서도 방문해보고 싶은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익히 알려져 있다.또한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피해 도심 광장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노라면 근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 출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여유와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벗어난 것 같은 이 도시를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알프스 산맥 사이를 휘돌아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제르 강이 갈라지는 곳에 자리잡은 세계적인 연구시설들이다. 유럽의 X선 생물물리학의 핵심 기점 중 하나인 유럽 방사광 연구소(ESRF, European Synchrotron Radiation Facility),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중성자 연구소인 라우에-랑제빈 연구소(ILL, Institut Laue-Langevin) 뿐만 아니라 유럽 분자 생물학 연구소(EMBL, European Molecular Biology Laboraty)와 X선 실험을 위한 실험 장비를 만드는 세계적인 회사 제녹스(xenocs)의 본사도 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풍스러움이 가득한 그로노블 중앙역에서 트램을 타고 연구소로 이동하다 보면 한 순간 건물들이 모두 현대적인 건물들로 변하는 마법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방사광 가속기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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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철문 옆 작은 사무실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몇 가지 절차를 걸친 다음 얼굴이 담긴 보안카드를 받고 나서자 철문이 절거덕 소리를 내고 열렸다. 보안절차를 담당하던 직원들은 사무실 내부에서 문을 조작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며 “성공적인 실험을 하길 바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고개를 꾸뻑 숙여 감사를 표하고 연구소 안으로 들어섰다. 연구소 정문을 지나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야트막한 라벤더 꽃무리를 중심으로 길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각각 방문연구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길과 ILL,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방사광 가속기로 향하는 길이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알프스의 만년설의 풍경에 감탄하며 방사광 가속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사광 가속기를 짧게 설명하자면 ‘밝고 큰 에너지를 가진 X선을 만드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X선은 물체를 통과하는 성질이 있는 큰 에너지를 가진 빛인데 가지고 있는 에너지 값에 따라서 물체에 대한 투과도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자면 뼈가 금이 가거나 부러졌을 때 X선 촬영을 하는데 이 X선은 피부는 잘 통과하지만 뼈는 잘 통과하지 못하는 에너지 값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관찰하려는 대상에 잘 맞는 에너지를 가진 X선을 사용하면 기존에 밝혀내지 못한 물질들의 구조나 특성을 밝힐 수 있어 물질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연구 주제가 된다
방사광 가속기의 가장 큰 특징은 도넛 모양의 형태에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에너지를 잃을 때, 즉, 어딘가에 부딪혀 속도가 크게 감소하거나 방향을 틀어주면 줄어든 만큼의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방출되는데 이 빛이 바로 X선이 된다. 실험에 사용되는 큰 에너지의 X선을 얻기 위해서는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때문에 방사광 가속기는 도넛과 같은 독특한 형태로 지어진다. 도넛의 한 중앙에는 전자를 쏘아주는 ‘전자 총’이 자리잡고 있으며, 도넛과 같은 동그란 링 구조물을 따라 이 전자를 가속시켜주기 위해 고안된 전자석들이 촘촘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가 이 링 안을 회전하면서 가속되어 높은 에너지의 X선을 방출하게 된다. 방사광 가속기에서 전자를 충분히 안정적으로 계속 가속을 하기 위해서는 수 km 반경을 갖는 거대한 도넛 형태의 건물이 필요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X선은 도넛의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마치 놀이동산에 있는 회전 그네처럼 동그란 도넛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실험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각 실험 건물들은 빔라인이라 불리며 고유한 ID번호로 불린다. 모든 건물들의 생김새가 비슷비슷한데다 특수 목적 건물들과 공중다리로 연결되다보니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종종 거대한 도넛 고리 바깥을 지친 얼굴로 돌아다니거나 혹은 내부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이 곳에서 일하는 친구는 웃으며 밥 먹고 소화가 안되면 종종 고리를 한 바퀴씩 도는 산책을 하며 길 잃은 사람들에게 안내를 해준다고 이야기를 했다
[한 번의 실험이 한 편의 논문으로]
방사광 가속기에서의 연구가 쉽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방사광 가속기를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빔라인의 수와 사용 가능한 시간대가 제한되어 있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많은 가속기 연구소들은 일 년 중 정해진 기간동안 연구 제안서를 받고 그 중 몇 개의 연구를 선정해 실험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게 제공받은 실험 기회를 ‘빔타임’이라고 부른다. 큰 에너지를 갖는 X선을 만들고 시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전기, 비싼 설비, 그리고 필요한 모든 설비를 다룰 수 있는 전문직 과학자인 ‘빔라인 과학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 하루 밤의 실험일지라도 실제로 투입되는 모든 자원들의 규모는 일반인들의 한 달 월급을 훌쩍 넘는다.
때문에 한 번의 빔타임을 받기 위해서는 이 연구가 가치 있음을 설득해야 하며, 동시에 어떤 실험 방법과 어떤 조건으로 실험을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사전 연구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빔타임을 받게 되면 그 때부터 연구자들은 실험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한 번의 빔타임을 위해 몇 날 며칠, 혹은 몇 달간 실험 준비를 한다. 그리고 빔타임이 다가오면 비장한 각오를 하고 수많은 장비와 준비해둔 샘플들을 어깨에 이고 지고 그로노블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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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빔타임은 항상 첨예한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최소 하루 이틀 전 먼저 연구소에 도착해 장비를 풀고 하나씩 점검을 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점검을 한다. 종종 이송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물건이 분실되거나 고장나기도 하고, 샘플이 파손되기도 해서 어떤 연구팀들은 두 세 팀으로 나뉘어 시간 차를 두고 연구소에 도착하기도 하고, 때론 비슷한 장비나 부품을 가지고 있는 다른 연구팀을 수소문해 때아닌 구걸을 하러 가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빔타임이 시작되면 모든 참여인원들이 사전에 정했던 실험 조건들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빔라인 과학자는 모든 장비를 원격으로 제어하며 원하는 실험 조건을 만들어 낸다. 높은 에너지를 갖는 X선은 인체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모든 실험에 대한 조작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원격으로 진행된다. 빔라인 내부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가 장비의 이곳저곳을 비추고 있고, 최소 여덟 개에서 열 개 가량의 모니터가 카메라 영상과 장비의 특성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모든 회의가 끝나고 빔라인 과학자의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맞춰 모터가 돌아가고, 샘플은 천천히 X선 앞으로 이동하며, X선 앞을 가로막고 있는 셔터를 오픈하면 마침내 실험이 시작된다. 모니터에 측정된 결과가 뜨기 시작하면 연구자들의 얼굴에는 희비가 빠르게 교차된다.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사나흘 정도의 시간동안 좋은 품질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빔라인은 24시간 돌아간다. 우리의 실험을 책임졌던 빔라인 과학자는 빔타임을 ‘수확 시기(Harvesting season)’라고 불렀다. 단 한 번의 실험을 위해 3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매일 밤낮없이 새로운 장비를 개발하고, 테스트하고, 최대한 많은 샘플을 준비한다. 사흘간 잠도 자지 않고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돌발상황에 대처하고 나면 그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 연구자들과는 기묘한 전우애가 생긴다.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몇 날 며칠을 분석을 하다보면 마침내 한 편의 논문이 탄생한다.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력적인]
방사광 가속기에서 연구를 하는 건 분명 고되고 힘들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도 단 며칠만의 시간이 허락되며, 그 시간 안에서 무조건 최고의 결과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밀도 높은 논의들, 서로가 서로의 열정에 취해 피곤한지도 모르고 연구에 열중하는 그 시간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빔타임의 마지막 밤을 보낸 우리는 지쳐서 축 늘어진 몸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떠오르는 해를 봤다. 터벅터벅 걸으며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마지막 남은 긴장 한 톨마저 털어냈다. 멀리서 풍겨오는 고소한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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