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의 과학 - 천년가는 종이, 전통 한지의 비밀

'지천년(紙千年) 견오백(絹五百)’이라는 말이 있다. 즉, 비단의 수명은 오백 년을 가지만 한지의 수명은 천 년을 간다는 말이다. 천 년이 지나도 종이로서의 수명을 잃지 않는 한지의 내구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천년을 가는 종이, 한지
1966년 발견 당시, 오랜 산화작용으로 인하여 부식되고 일부가 훼손되기는 했으나 본문의 내용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보존상태가 우수했던 다라니경. 수명이 최대 100년인 오늘날의 종이에 비해 1,2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낸 우리 전통 한지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한지의 어원은 원래 닥나무 껍질을 가공하여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말로, 구한 말 일본을 통하여 기계로 만든 서양식 종이가 나오면서 그 이전의 종이를 한지(韓紙), 기계로 만든 서양의 종이를 양지(洋紙)라고 구분하여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외형이나 특징이 비슷한 개량 한지나 중국에서 수입된 종이들을 모두 한지라고 부르고 있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 전통 한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닥나무 껍질을 주원료로 하여 손으로 직접 떠서 만든 종이(수초지, 手抄紙)’라고 할 수 있다.
전통 한지는 무엇으로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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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지 만들기
전통 한지의 제조과정은 일반적으로 1) 닥 채취하기 → 2) 닥 찌기 → 3) 껍질 벗기기 → 4) 물에 담그기 → 5) 삶기 → 6) 씻기와 표백 → 7) 두드리기 → 8) 해리 → 9) 종이 뜨기 → 10) 물빼기 → 11) 말리기 → 12) 다듬기 → 13) 다리기의 13단계로 이루어진다.
1) 닥 채취하기
닥나무는 한로를 전후한 11월에서 2월 사이의 1년생 햇닥을 베어서 썼는데 그 이유는 햇닥이 섬유가 여리고 부드러워 종이 뜨기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나라 전통 한지의 원료가 닥나무 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의 책지 제작에 사용된 원료나 한지의 종류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7세기 중엽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닥을 주원료로 썼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적 발간에 따른 수요가 급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 뽕나무, 벼, 갈대 등 다양한 원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2) 닥 찌기(닥무지)
채취해 온 닥은 한 달 이내에 삶아서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그 이유는 수분이 많아야 껍질이 잘 벗겨지기 때문이다. 거둬들인 닥나무를 껍질이 잘 떨어지도록 가마에 물을 붓고 찌는 과정을 ‘닥무지’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닥나무 30근을 찌면 흑피 3근이 나오고 여기서 백피 1근, 즉 약 200여 장의 백지를 만들 수 있다.
3) 껍질 벗기기(흑피 → 청피 → 백피)
5시간 정도의 닥무지 과정이 끝나면 다 쪄진 닥나무의 껍질을 벗길 수 있는데, 이렇게 벗긴 껍질을 햇볕에 말리면 흑피가 된다. 이것을 찬 냇물에 10시간 동안 불린 후 겉껍질을 칼로 벗겨내면 청피가 나온다. 이 청피를 다 벗겨내 하얗게 만든 것이 바로 백닥(백피)이다. (껍질 벗기기 작업은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흑피나 청피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한지에 누렇고 검은 반점이 생겨 품질을 떨어뜨린다.)
4) 물에 담그기 |
5) 삶기
물에 충분히 불린 백피를 약 30~40cm의 크기로 잘라 가마솥에 잿물 을 넣고 쇠죽을 끓이듯이 약 8시간 정도 삶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증해(蒸解)라고 하는데 이 때 사용되는 잿물은 닥 섬유의 셀룰로오스 성분만 남기고 종이를 누렇게 변색시키는 리그닌 성분 및 기타 불순물 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6) 씻기와 표백
삶은 닥 섬유에 남아 있는 잡티를 고르기 위해 흐르는 물에 씻고 햇볕에 말려 표백을 하는 과정이다. 특히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맑은 물이 나올 때 까지 계속 씻어야 한다. 씻는 과정이 끝나면 흐르는 물 속에 백피를 펼치고 섬유 전체에 햇볕이 골고루 내리쬐도록 해주는데, 백피를 더욱 하얗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 과정은 물 속에서 햇빛의 자외선 광화학 작용으로 오존 및 과산화수소가 발생하여 산화 표백되는 것이다.)
7) 두드리기(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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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가 끝나면 물에 섬유를 풀어 종이를 뜰 수 있는 상태로 해리(解離) 시킨다. 즉 반죽이 된 섬유를 물통에 넣어 섬유가 다 풀어지도록 하는 과정이다.
해리 과정은 종이를 뜨기 직전의 마지막 과정으로서 이 작업을 통해 뭉쳐있거나 덜 풀어진 섬유들은 충분히 풀어지게 된다.
9) 종이 뜨기
해리된 닥 섬유를 미세한 틈으로 이루어진 ‘발’과 이를 지탱하는 ‘발틀’로 건져 내면 종이, 즉 지면(紙面)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지는 종이를 뜨는 기술과 방법에 따라 종류와 품질이 달라지게 되는데, 여기서는 전통 한지의 제작방법인 ‘외발뜨기’와 현재 많이 이용되는 방법인 ‘쌍발뜨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외발뜨기: 직사각형의 작은 발 하나를 턱이 없는 발틀 위에 얹고 공중에 매달린 가로 막대에 한 줄로 매달아 전후, 좌우로 흔들어 종이를 뜨는 방식이다. 즉 전후, 좌우로 물을 흘려 보내 닥 섬유가 서로 엇갈리게 결합(하나의 끈으로 묶여있는 발틀 위에 발을 놓고, 앞물은 떠서 뒤로 흘려 버리고 옆물을 떠서 반대쪽을 흘려버리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발뜨기는 닥 섬유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서로 얽혀 질기고 강한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종이 한 장을 뜨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 쌍발뜨기: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들어와 전파된 종이 제조법이다. 발틀 주변에 약간의 턱이 있어 물이 그 안에 고여 있다가 섬유질만 남기고 물은 밑으로 빠져 나가도록 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큰 발틀을 지통에 담가 섬유 조직들이 사방으로 얽히도록 전후, 좌우로 흔들어 담궜다 빼내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얇고 투명한 습지가 된다. 외발뜨기에 비해 종이의 두께가 일정하고 고른 종이를 뜰 수 있으나, 섬유 조직들의 방향이 치밀하지 못해 종이가 질기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10) 물빼기
널판지 위에 얇은 발을 깔고, 그 위에 종이를 뜬 발을 뒤집어 놓은 후 홍두깨 모양의 방망이(굴렁대)를 굴려 물기를 빼주면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습지만 남게 되는데, 이 때 습지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잘 포개놓는 것이 종이의 품질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종이를 쌓을 때는 종이와 종이 사이에 실을 놓아 나중에 종이를 떼어내기 좋게 한다.
마지막으로 물기를 제거하기 위해 포개어 놓은 종이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 놓아 자연스럽게 수분이 빠지게 한다.
11) 말리기(건조)
하룻 동안 압착한 종이라도 약 60% 이상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습지 상태로 있게 되는데, 이 수분을 제거하면 비로소 한지가 완성된다. 건조방식으로는 습지를 목판에 붙여 햇볕에 말리는 일광건조와 철판으로 된 면에 열이나 증기를 가해 데운 다음 그 위에 종이를 펴서 말리는 철판건조로 나눌 수 있다.
12) 다듬기(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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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다리기
도침이 끝난 뒤에도 주름이 계속 남아있는 경우, 도침을 반복하거나 다리미로 다림질을 하여 완전히 펴면 비로소 한지가 완성되게 된다.
우리 전통 한지의 위치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에 근무하는 외국인들에게 “세계에서 품질이 가장 좋은 종이는 무엇인가요?”하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 아마도 열명 가운데 여덟은 Japanese paper(和紙, 화지)라고 말할 것이다. 장기 보존성과 내구성, 그리고 기능성이 뛰어난 우리 한지를 제치고 일본 종이가 최고라니. 서글픈 현실이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 준 종이제조 기술을 일본은 대를 이어가면서 전승하고 발전, 개량시켰지만 우리는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각종 화학약품과 기계를 이용한 양지가 그 수요를 대체하여 오늘날 퇴보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 전통 한지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지의 수요를 적극 발굴하는 한편 홍보 마케팅을 통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관련 장인 및 후계자들을 지속적으로 양성하여 그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잿물
볏짚이나 메밀대, 콩대 등을 태운 재를 물에 섞은 것을 말한다. 이 잿물을 만져보면 비눗물처럼 미끈미끈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pH 10~12정도의 알칼리성을 띠고 있어 섬유 속의 각종 불순물들을 제거해 줌은 물론 섬유 고유의 광택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산성인 양지에 비해 우리 한지가 중성(pH 7)을 띠어 그 수명이 천년을 가는 것도 잿물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제공 국립과천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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