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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element)

특정 원자번호를 가진 원자(原子)에 의해 대표되는 물질종(物質種). 현재까지 지구상에서 111종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예전에는 순수한 물질로서 어떤 방법으로도 2종 이상의 물질로 나눌 수 없고, 또 어떤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의 화합으로도 만들 수 없을 때 그 순물질을 구성하는 종(種)을 원소라 정의했다.
그러나 원자의 인공변환(人工變換)에 성공하여 많은 동위원소(同位元素)가 발견됨에 따라 그 때까지의 정의로는 충분치 않고 더욱이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입자(粒子)로서의 원자를 생각함으로써 원자가 지니는 속성(屬性)이 주목되어 원소의 개념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원소관의 변천〕 원소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이며 고대의 중국 · 인도 · 이집트 · 그리스 등에 그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고대 철학자들의 단순한 사고에 의한 것이며 현재의 과학자가 가진 개념과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더라도 실험적인 근거는 없으며 현대의 원소관과는 본질 적으로 다르다.
고대에는 원소는 물질을 만드는 근본재료로서 신(神)의 도움없이 스스로 변화하여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본질은 불생(不生) · 불멸(不滅)이라 생각했다.
① 탈레스의 만물일원론(萬物一元論) : 근원적 물질로서 B.C. 7세기경 최초로 만물일원론이 탄생했다.
그리스의 탈레스는「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모든 것은 물로 이루어지며, 또 물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즉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것은 그 형제는 천차만별이지만 단 하나의 근원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근원물질은 불생 · 불멸이고 그 것이 형태를 바꾸어 자연의 사상(事象)으로서 나타난다.
이 근원물질이 바로 물이다.
물은 얼음과 증기가 되고 눈과 구름도 되며 또 생물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추상적인 의미의 물을 근원물질이라 생각했다.
그 후 그리스의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원물질이라 생각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 주장했으며 헤시오도스는 흙이라 생각했다.
② 엠페도클레스의 사원론(四元論) : 탈레스의 만물일원론과 그 외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논란을 빚자 그 후 각종 이원론 · 사원론 등이 출현했다.
B. C. 5세기 중엽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는 앞에 나온 4종의 일원론을 통합하여 근원물질은 흙 · 물 · 공기 · 불의 네 가지이며 이것이야말로 만물의 근본적 4원소로서 영구적 · 자연적이며 서로 전화(轉化)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무를 가열하면 불이 되어서 타고 바람(공기)이 생기며 습기(물)가 생기고, 재(흙)를 남긴다는 사실은 나무가 그 성분인 불 · 공기 · 물 · 흙의 4성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흙 · 물 · 공기 · 불은 각기 고체 · 액체 · 기체 · 에너지를 대표하고 각각 중량 및 건 (乾) · 습(濕) · 냉(冷) · 열(熱) 등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이 네 원소가 사랑에 의해 서로 혼합하고 미움에 의해 분리함으로써 세계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 했다.
③ 인도 · 중국의 원소관 : B.C. 7세기에서 B.C. 6세기에 걸쳐 인도의 카필라(Kapila)를 개조(開祖)로 하는 철학자들이 제창한 사대(四大)의 설이라든가, 역시 인도에서 B.C. 6세기 또는 B.C. 5세기경 카나다(Kandada)를 시조로 하는 철학자들이 제창한 사대설(四大說)도 만물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 (風)의 4대종에서 생긴다고 했다.
다시 B.C. 6세기 초에 석가(釋迦)가 이 4대에 공(空)을 더하여 5대(五大)로 보강했는데, 어쩌면 인도의 이들 4대 또는 5대의 원소관이 그리스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고대 중국의 오행(五行 ; 火 · 木 · 土 · 金 · 水) 의 사상도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④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대 원소관의 통일 : 이런 생각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리되어 중세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신봉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에 다시 제5원소 하나를 추가하여 제5원소야말로 세계를 이루는 유일한 근원재료인 제1물질(quinra essentia)로서 실재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가능적 존재이며, 여기에 건 · 습 · 냉 · 온의 네 가지 성질이 더해져 불 · 물 · 공 기 · 흙의 4원소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서로 혼합 되어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제1물질에 의한 일원론(一元論)이다.
이 생각은 석가가 생각한 지 · 수 · 화 · 풍의 4대에 더한 공(空)과 대응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공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물질과 같은 것 이라 한다면 이들 원소관에는 공통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이미 금 · 은 · 구리 · 철 · 수은 등의 금속과 탄소 · 황 등도 알려져 있었으므로 원소에 대한 인식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⑤ 연금술사(鍊金術師)에 의한 물질변환의 시도 : 이와 같은 제1물질 내지 공을 통해 4원소가 서로 변환하고 또 모든 물질을 만든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신봉 되었으며 그 생각에 따라서 물질변환(物質變換)을 시도한 것이 중세의 연금술사들이다.
연금술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사람들보다 실험사실을 더 많이 알고 있었으며, 화 · 수 · 토 · 풍의 4원소보다 현실적인 물질을 원소로 생각했다.
예컨대, 아라비아의 자비르 이븐 하이얀(]abir ibn Haiyan ; 8~9세기)은 수은 · 황 · 식염을 3원소로 생각했다(16세기초의 파라셀수스도 이렇게 생각하여 파라셀수스의 3원설이라고도 불린다).
이 가운데 수은 · 황이 현재 원소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다.
〔근대적 원소관〕 원소의 개념에 과학적인 검토가 가해진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이며 현재 통용되는 근대적 원소관을 확립한 것은 영국의 R. 보일이다.
㉠ 보일의 제창 : 그는 원소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단지 추상적인 추리에 의함이 없이 실험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그는 그 유명한 저서《회의적인 화학자(The Sceptical Chemist)》에서「모든 복합물(mixed bodies)은 이것을 분해해 가면 마침내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원시적이고 단순한 물질에 도달한다. 이것이 원소이다」라고 서술했다.
그는 이 저서의 대부분을 그 때까지 생각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설, 파라셀수스의 3원설에 대한 반론(反論)에 할애했다.
보일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파라셀수스의 견해들 비판하여 가열했을 때의 생성물이 4원설이나 3원설과 같은 형태로 원래의 물질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입자설(粒子說)을 제기했다.
㉡ 플로지스톤(phlogiston)설 : 보일의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4원설이나 3원설은 형태를 바꾸어서 널리 믿어졌다.
보일과 같은 시대의 프랑스의 N. 렘리는 황 · 수은 · 식염의 3원소에 다시 물과 흙을 더한 5원설을 주장했으며, 보일이 죽은 후 10년 지나서 독일의 G. E. 슈탈은 3원설의 황의 변형물(變形物)이라고도 할 만한 플로지스톤(燃燒)의 가설을 주장했다.
슈탈이 제창한 플로지스톤설은 매우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플로 지스톤설은 현대화학과는 반대되는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영국의 J. 프리스틀리는 플로지스톤설을 굳게 믿으면서도 1771년 처음으로 산소를 분리하여(그는 산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을 75년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로서 발표했다.
납이나 주석 등의 금속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금속재가 되는 현상을 회화(灰化 ; 현재는 하소(-燒)라 한다) 라 하였는데, 그 때 중량이 증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보다 전에 보일은 밀폐된 유리용기 속에서 금속을 연소시키는 실험을 하여 그 중량증가는 극히 미세한 불의 입자가 유리 용기의 벽을 통과해서 결합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고 그의 입자설에 의해 설명했으며 그에 이은 사람들도 플로지스톤에 대해 똑같이 설명했다.
㉢ 라부아지에의 플로지스톤설 비판 : 이에 대해 프랑스의 A. L. 라부아지에는 1771~74년에 걸쳐서 연소(燃燒) 현상을 연구하고 또한 프리스틀리의 탈플로지스톤 공기에 계발(啓發)되어 마침내 77년 공기가 두 종류의 기체로 이루어지며 연소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 한쪽뿐이고 연소와 회화(灰化)는 플로지스톤의 분리가 아니라 산소와의 결합이라는 것을 밝혀내어 산소의 본성을 파악했다.
이에 비로소 플로지스톤은 공상(空想)의 원소임이 지적되었으며, 공기는 원소가 아님이 밝혀져 새로운 원소가설(假說)이 제창되었다.
라부아지에는 81년 모든 산(酸)은 비금속성 물질과 공기 중의 연소를 뒷받침하는 기체와의 결합물이라고 생각하고 이 기체에 산을 만드는 원소, 즉 산소(oxygene)라는 이름을 붙였다.
㉣ 근대로의 탈피, 새 원소의 발견 : 그 때까지의 원소설이 부정되고 새로운 원소로서 산소가 등장한 후 잇따라 수소와 질소 등 기체 원소가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화학의 근대로의 탈피라고도 할 만한 커다란 전기(轉機)가 되었다.
이 무렵에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고 물을 분해하면 수소와 산소로 분해된다는 것도 알려졌다.
또한 원소를 분석하여 도달한 궁극점, 즉 어떠한 수단으로도 그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물질이라 정의했다.
그 무렵 원소라는 말은 홑원소물질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혼용(混用)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89년에 라부아지에가 쓴《화학교과서》속의 홑원소물질표에는 4종으로 분류된 홑원소물질을 들고 있다.
다 만, 이중 4번째의 분류에 속하는 것은 장차 반드시 분해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그로부터 십 수년 후 실제로 분리되어 예언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 그 보다 수년 전에 발표된 저서에서는 이 뒤에 제5의 분류로서 가성알칼리가 있었으며 그것은 반드시 분해될 것으로서 이미 제외되어 있었다.
이 무렵의 원소관은 원자설(原子說)과 결부되고, 실험 기술의 진보와 함께 더욱 세련되어 갔다.
또 새로운 원소도 발견되어 19세기 말경까지 현재 알려져 있는 원소의 대부분이 발견되었다.
즉 이제까지 화학적 수단으로는 손이 미치지 않았던 원소에 대해서도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는 전기분해가 19세기 전반에, 이어서 분광분석(分光分析)이 19세기 후반에, 다시 20세기에 들어서자 X선에 의한 확인이 이루어지면서 발견된 원소도 약 80종에 이르렀다.
㉤ 주기율표에 의한 새 원소의 예언 : 원소에 대해 특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의 W. 프라우트는 1815년 당시의 원자량이 정수(整數)라는 데 착안하여 모든 원소의 원자는 수소원자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세우고「원소는 원시수소(原始水素)의 원자의 서로 다른 집합체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생각은 원소의 상호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 근대적 원소관의 성립 : 1896년 프랑스의 A. H. 베크렐의 방사능(放射能)의 발견, 98년 퀴리 부부의 라듐의 발견에 의해 원소의 붕괴가 실증되자 위의 정의에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E. N. 러더퍼드와 F. 소디 등에 의한 방사능의 연구에서 원자 내부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후에 원소의 상호전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나아가 동위원소의 존재가 발견되자 원소의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성분으로 분해할 수 없다는 정의는 맞지 않게 되었으며 같은 원자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원소의 독립영존성(獨立永存性)을 기초로 한 정의가 시도되어 혼란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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