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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니우스(Svante August Arrhenius)

작성일 2010-08-19

1859~ 1927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17세 때 웁살라 대학에 입학하고 학위논문의 테마로 물리학을 택했으나 지도교수와 뜻이 맞지 않아 1881년 스톡홀름으로 옮겼다.

그 곳에서 전해질용액(電解質溶液)의 전기전도도(電氣傳導度)를 연구하여 84년 학위논문으로 웁살라 대학에 제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이미 독특한 이온화설, 즉 전해질이 물속에서 이온으로 해리(解離)했다는 설을 전개했으나 높이 평가받지는 못했다.

이온해리설 같은 엉뚱한 생각은 당시「화학도 아니고 물리학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가치와 중요성을 재빨리 평가하고 세상에 소개한 사람은 그 무렵 반트 호프와 협력하여「물리화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던 대(大)오스트발트였다.

그래서 오스트발트 · 반트 호프와 더불어「이온주의자」3인조를 구성하여 이온설 보급에 힘쓰는 동시에 라이프치히학파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물리화학의 확대 · 강화에 헌신 했다.

95년 스톡홀름 공과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고 96년부터 1905년까지는 동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03년에는 이온화설이 화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것은 그를 평가하여 세상에 소개한 오스발트의 수상(1909)보다 6년이나 앞선 것이다.

아레니우스의 이온해리설은 N. J. 비에룸, P. J. W. 디바이, W. 휴켈 등의 강한 전해질 이론으로 발전했다.

05년 아레니우스는 베를린 대학의 초청을 사양한 뒤 그해에 신설된 노벨 연구소의 물리화학부장이 되어 사망하기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아레니우스의 이름을 불후(不朽)로 만든 또 하나의 업적은 화학반응속도와 온도의 관계에 관한 소위 아레니우스의 식(式)이다.

1889년의「산(酸)에 의한 자당(蔗糖)의 전화속도」의 연구에서 반응속도가 온도와 함께 지수함수적(指數函數的)으로 증대한다는 것을 논하는 가운데 소위 활성화 혹은 활성화 에너지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현대의 반응속도 이론의 체계화를 주도 했다.

그는 반응속도와 온도의 관계를 도출하는데 반트 호프가 정식화한 화학평형 이론을 채택했다.

속도과정을 평형상태의 문제에 연관시키는 이런 방법은 그 후 H. 아이링 등의 절대반응속도 이론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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