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 프랑스의 화학자. 이전부터 가정적으로 친교가 있던 지질학자 J. E. 게타르의 영향을 받아 광물 표본을 수집하고, 화학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1764~65년 최초의 화학 연구로 석고의 분석을 했을때 이미 정량적(定量的) 방법이 사용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7년에는 게타르와 함께 광물지질 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여행을 했고, 그후 10년 동안 이 지도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68년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있다는 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물을 밀폐한 용기 속에서 101일 동안 끓이고 정밀하게 계량함으로써, 생성된 흰 침전물은 용기의 내벽이 녹은 것임을 밝혀내어 그 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당시 연소(燃燒) 현상이 화학자의 관심을 끌어 다이아몬드의 연소와 볼록렌즈를 사용한 태양광선에 의한 연소 실험이 되풀이되었다.
쉬타르의 플로지스톤설 (phlogiston說)에 의하면, 연소란 일종의 분해 현상으로, 연소물 속에 내포되어 있는 플로지스톤(燃素)이 튀어나와 열과 불길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금속이 가열에 의해 금속재(金屬灰)가 되는 가소(假燒)도 같은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적으로 연소 후에 남는 재는 가벼워지는데 금속재는 모두 중량이 증가하는다는 것이 밝혀져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 인가가 문제였다.
라부아지에는 72년에 인(燐)의 연소실험을 통해 중량이 증가함을 확인하고, 황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발견했다.
그때 공기가 흡수된다는 사실에 착안, 연소와 가소에서의 중량 증가의 원인은 공기의 흡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플로지스톤을 부정하지 않고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과 공기가 교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흡수되는 이 공기는 J. 블래크가 l755년경에 발견한「고정공기」(이산화탄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1775년 라부아지에는 산화수은을 강열(强熱)해 산소를 얻는 실험을 되풀이한 끝에 이산화탄소와의 구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산소라는 명칭은 79년에 제창되지만, 그 동기는 일반적으로 산소와 결합하면 산이 생성된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소할 때의 중량 증가는 결합하는 산소의 양에 일치했다.
따라서 연소(燃素)를 가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그는 플로지스톤설을 비판했다.
87년 기통 드 모르보를 중심으로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반(反)플로지스톤파에 의해 《화학 적 명명법(命名法)》이 출판되어, 원소(元素)의 정의와 함께 수소·질소 등의 명칭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 원소 속에는 빛과 칼로릭(열소〈熱素〉)이 포함 되어 있으며, 라부아지에에 따르면 산소가스란 산소 원소와 칼로릭이 결합한 것이었다.
89년 이러한 신명명법 및 새로운 기제화학에 입각, 입문서로서 《화학요론(要論)》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사용해 온 질량보존(質量保存)의 원리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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