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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인물)

작성일 2009-04-01
< 퀴리 >
피에르 퀴리는 1859년 5월 15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니었다. 피에르의 아버지는 개업 의사였는데, 평생을 두고 과학에 정열을 쏟은 사람이었다. 피에르는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을 오로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받았다. 그의 꿈 많은 성격은 학교 선생들의 틀에 박힌 수업을 견뎌내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는 피에르의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 느리기는 하지만 결코 나쁜 머리는 아니라고 믿어서 끈기 있게 가정 교육을 계속하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피에르는 자기 나름대로 깊이 사물을 생각하고 정신을 쏟아서 확실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버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74년에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16세의 나이로 파리 대학에 입학하고, 이듬해인 17세 때에는 벌써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의 물리학 조수로 근무하였다. 이윽고 파리 시립 물리학교의 실습주임이 되고, 곧 교수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선생이라기보다는 친구 사이와 같은 친밀감으로 실험을 지도하고 강의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훌륭한 과학상의 연구를 발표했었다.
마리의 젊은날
마리 스클로도프스카(Marja Sklo-dowska)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으며, 부장학관까지 지냈다. 어머니도 교육가로서 여자 중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마리는 바르샤바의 여자 중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가정교사가 되었으나, 24세 때 파리로 가서 파리 대학의 이학부에 들어가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마리는 피에르를 알 무렵에는 이미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수학과의 졸업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에르와 미리아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인류를 널리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는데,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두 사람의 마음은 깊이 상통하였다. 이 두 천재가 결혼한 것은 1894년이었고, 마리아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마리 퀴리(Marie Curie)로 불렸다. 결혼 후 마리는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의 실험실에서 남편 곁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퀴리 부부의 결혼 생활
1897년에 맏딸 이렌(Irene)이 태어났다. 마리는 연구가·아내·어머니라는 1인 3역을 놀라울 정도로 다해냈으며 그리고 이 바쁜 생활 속에서도 라듐을 발견하였다.
피에르와 마리의 업적은 점점 학계에 인정받았으나 두 사람의 지위는 아직도 낮았다. 1900년에 피에르는 파리 대학 의과의 준비 교실(예과)에서 물리를 가르치게 되었고, 마리는 그 해 세부르여자 고등사범학교에 취직하였다. 1903년에는 학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노벨 물리학상이 피에르와 마리아와 베쿠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 1908) 세 사람에게 공동 수여되었다. 퀴리 부부의 연구 가치는 프랑스보다 다른 나라에서 더 빨리 인정받았는데, 1904년에 비로소 피에르는 파리 대학의 교수로, 1905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퀴리 부부로서는 이러한 명성은 도리어 연구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두 사람이 가장 바랐던 것은 좋은 연구소를 갖는 일이었는데, 피에르가 죽을 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6년 4월 19일 피에르는 마차에 깔려 죽고 말았다. 마리는 얼마 동안 깊은 슬픔에 잠겨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나 이윽고 늙은 시아버지와 그녀의 두 딸을 안고 재기의 발돋움을 하였다.
1906년 11월 5일, 마리는 남편의 뒤를 이어 파리 대학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의 고등교육(대학교육)에 있어서 부인이 교단에 선 최초의 예이기도 했다. 그 후의 마리의 생활은 예전에 비하여 매우 쓸쓸했으나, 그녀는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아카데미는 피에르가 죽은 후에도 마리의 연구가 뛰어나다고 인정하여, 1911년에 또다시 노벨 화학상을 마리에게 수여하였다.
1914년에는 피에르가 죽을 때까지 꿈꾸어 왔던 훌륭한 연구소를 갖게 되었다. 이 연구소로 가는 새 거리는 피에르 퀴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소장은 바로 마리 퀴리였다. 이 연구소에서 마리는 스스로 연구하고 많은 학자들을 지도하고 양성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때는 방사선 치료차로 부상병을 치료하는 일도 하였다.
1921년에는 미국에 초청되어 대환영을 받았으며, 당시의 미대통령 하딩(W.G. Harding)은 1g의 라듐을 마리에게 주었다. 또 1929년에 다시 미국은 1g의 라듐을 그녀에게 보내왔는데, 그것은 바르샤바의 연구소(대전 후 독립한 폴란드의 수도에 부인 자신이 세운 것)에 대한 것이었다. 라듐의 제조법은 퀴리 부부가 발명한 것이므로 이것을 특허 출원했으면 백만장자도 되었을 것이나 만인을 위하여 도움이 될 라듐을 독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 자신 Ig의 라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마리 퀴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라듐의 방사선을 쬔 결과 악성 빈혈을 일으켜, 1934년 7월 4일 산세르모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연구와 강의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퀴리 부부의 업적
피에르가 마리와 결혼하기 전에 이룩한 빛나는 업적은 압전기(피에조 전기)를 형 자크(Paul Jacques)와 공동으로 발견한 사실이다. 피에르는 이에 관련하여 결정학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업적을 올렸다. 또, 여러 가지 물질을 자기적 성질에 관한 피에르의 연구도 가치 있는 것으로서, 상자성체에 관한 <퀴리의 법칙>, 강자성체에 있어서의 <퀴리점>이라고 하듯이 그 명칭이 피에르의 연구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밖에도 피에르의 중요한 연구는 적지 않다.
결혼 3년 뒤인 1897년은 피에르의 어머니의 사망, 맏딸의 출생 등 가정적으로도 매우 분주하였지만 연구상으로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그 해 가을부터 아내인 마리는 학위논문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 제목은 1896년에 베쿠렐이 발견한 우라늄의 신기한 작용이었다.
이 작용은 뒤에 마리에 의해서 방사능이라고 이름지어 졌다.
당시 이 현상은 아직도 거의 설명되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는 우란 외에도 토륨에도 방사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어떤 종류의 광석은 그 속에 들어있는 우란이나 토륨 함량으로 추정되는 방사능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나타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이들 광석이 우란이나 토륨보다 훤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 미지의 물질을 소량으로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마리의 연구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피에르는 이 미지의 물질에 크게 흥미를 느끼고, 자기의 결정에 관한 연구를 집어치우고 마리의 새로운 연구에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우란의 원광석인 피치블랜드의 조직적인 분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과연, 강한 방사성을 가진 2종의 새 물질이 함유된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그 함유량은 원료의 100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1898년 7월에는 폴로늄, 같은 해 12월에는 라듐의 발견이 보고되었다. 폴로늄이라는 이름은 마리가 태어난 나라 폴란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 새 원소의 존재는 비교적 빨리 확인되었으나, 화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새 원소 또는 그 화합물을 다른 물질에서 분리하여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화학적 처리는 주로 인내력이 강한 마리가 맡았으나 그 함유량이 적으므로, 몇 톤의 원료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는 드디어 라듐염을 순수한 모양으로 빼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피에르는 주로 라듐의 물리적 성질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험을 위해서는 비용과 인력과 장소에 있어서 심한 어려움을 받았으나, 퀴리 부부의 정열과 과학적인 계획 수립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이 노력의 결과는 1900년에 파리에서 개최한 국제 물리학 회의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퀴리 부부는 그 후 라돈, 라듐의 발열작용, 생리작용, 전자와의 관계, 기타 방사능에 관한 중요한 연구를 여러 가지 발표하였다. 이들 연구는 전세계의 물리학계에 '방사능 시대'를 출현시키는 데 자극이 되었다.
방사능이 <원자의 변환>을 일으킨다는, 여태까지의 과학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던 가설이 영국의 러더퍼드(E.Rutherford )와 소디(F. Soddy)에 의해 제출되기 전에 이미 퀴리 부부는 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900년).
피에르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나 연구상으로나 의지할 사람을 잃은 마리였지만 몇 개월 뒤에는 다시 일어서서, 죽은 피에르의 몫까지 대신해서 마무리지울 결심으로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라듐 및 폴로늄을 화합물로서가 아니라 원소로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방사능의 측정법, 방사능 단위의 결정 등의 중대한 연구를 잇달아 발표하였다. 피에르 퀴리 거리의 라듐연구소로부터는, 마리가 죽을 때까지 500편도 넘는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그 중 마리 자신에 의한 것만 해도 30편이나 된다고 한다.
피에르는 자기 생활이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실제의 사회와는 타협이 힘든 이상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리는 실제적인 사람으로 현실을 중히 여겼다. 피에르는 직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데 뛰어났으나, 마리는 한걸음 한걸음 논리에 따라 추론을 펴 나가는 데 뛰어난 것 같았다. 둘 다 이상에 대한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나, 피에르의 그것은 강하고 짧게 나타났고, 마리는 언제나 꾸준히 이상을 추구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격으로 큰 업적들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에 새로운 목표를 위해 결성된 연구자의 단체가 생겨 세계의 물리학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또 라듐 요법의 바탕을 쌓음으로써 암과 그 밖의 환자에게 광명을 준 것은 퀴리 부부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 부부는 과학이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었다.
피에르 퀴리는 노벨상을 받을 때의 기념강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라듐을 나쁜 사람이 쓴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인류는 과연 자연의 비밀을 알 자격이 있을까요? 새로운 지식이란 어쩌면 인류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면, 의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류가 새로운 발견에서 악보다는 선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피에르와 마리는 이런 생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 구석까지 퍼져나갈 것을 일생 동안 빌고 있었다.
졸리오 퀴리 부부
퀴리 부부의 맏딸 이렌과 그의 남편 프레데릭도, 퀴리 부부의 이와 같은 소원을 어어받아서 일생을 과학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몸바쳤다.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Fredeeric Joliot Curie)는 1900년 3월 19일 파리에서 작은 철물공장을 경영하는 앙리 졸리오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1923년에 파리의 물리 화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단 룩셈부르크의 철강공장 기사로 취직했으나, 실험실에서의 과학 연구를 열망한 끝에, 모교의 은사이며 유명한 물리학자인 랑주방(p. Langevin)의 소개로 마리 퀴리의 라듐 연구소의 조수가 되었다. 라듐 연구소에서는 마리의 맏딸 이렌이 역시 조수로서 다년간 방사능의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프레디릭은 곧 이렌과 친해졌으며,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다가 1926년에 결혼하였다.
프레디릭은 얼마 안 가서 실험물리학자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어느 때에는 단독으로, 어떤 때는 아내 이렌과 공동으로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다. 1932년에는 중성자의 발견의 직접적인 실마리가 된 중요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쳐서 조리오 퀴리 부부는 그때까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공방사능의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 업적에 대하여는 당장 이듬해에 노벨 화학상이 수여되었다. 인공 방사성원소의 갖가지 융용의 길이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원자력의 해방을 가져온 우란의 핵분열이 발견되기 직전에는 파리의 이렌을 비롯하여 베를린의 하안(O. Hahn)과 마이트너(L. Meitner), 로마의 페르미(E. Fermi) 등이 서로 경합했었는데, 결국 핵분열은 하안이 발견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프레디릭은 핵이 분열할 때는 몇 개의 중성자가 함께 방출될 것이라 예상하고,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조리오 퀴리 부부의 발견으로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가능한 것을 알게 되어, 원자력 해방을 겨냥한 연구가 본격화되었으며, 조리오 퀴리 부부도 재빨리 중수를 사용하는 원자로를 설계하였다. 그때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독일군에 점령되었는데, 점령된 조국 프랑스를 위해 독일 점령군과 싸운 레지스탕스 운동에 프레디릭도 참가하였다.
대전이 끝나자, 프레데릭은 원자력청 장관에 임명되어, 다른 나라의 도움을 전혀 빌지 않고 프랑스의 원자로 제 1호를 만들어내었다. 한편, 1948년 이래 세계평화 평의회 의장으로서 전세계의 평화 운동에 앞장섰다. 1950년 원자력 연구를 전쟁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연설로 원자력청 장관직에서 해임되어 다시 연구실로 되돌아온 조리오 퀴리 부부는 죽기 전의 수년간을 파리 교외의 오르세에 원자핵연구소를 창설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이렌은 1956년 3월 16일, 프레데릭은 1958년 8월 14일 과학과 평화를 위하여 몸바친 일생을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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