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2.12.25 ~ 1727.3.20)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수학자로 근대 이론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뉴턴 역학의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수학에서도 미적분학을 창시하였다.
초기에는 광학분야, 그 중에도 빛의 분산현상과 굴절률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졌으며 1668년에는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뉴턴에 관한 유명한 일화로는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후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한 것이 있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부터 계몽사상의 발전과 자연과학의 수학적 접근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이작 뉴턴은 퓨리턴혁명이 시작된 해에 영국의 링컨셔의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죽고, 그 후 어머니가 재혼했기 때문에, 외조모에게 양육되었다. 18세 때에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는 아직 새로운 과학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지만 뉴턴은 독력으로 데카르트라든가 케플러, 호이헨스 등 당시의 새로운 과학자들의 책을 통독하여, 커다란 충격과 연구에의 시사(示唆)를 받았다.
● 만유인력의 발견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일화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그것은 뉴턴이 대학을 졸업하고 22세가 되었을 때, 마침 영국에서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고향인 링컨셔로 돌아와서 대학에서 얻었던 갖가지 착상에 대하여 차분히 생각을 하고 있던 때의 일. 그 무렵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에서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과가 떨어졌을 때 뉴턴이 깨달은 것은 사과에 작용하는 지구의 중력의 크기와 달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를 비교하면, 이 중력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뉴턴이 쓴, 당시의 지구의 크기의 값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으며, 이 발견은 그 후 오랫동안 공표되지 않았다.
미분적분법과 프리즘에 의한 빛의 분해라는 뉴턴의 중요한 발견도 이 무렵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리즘의 연구에서, 렌즈를 쓰는 굴절 망원경으로는 색수차를 없앨 수가 없다는 것을 안 뉴턴은, 1668년에 오목면경을 쓴 반사망원경을 스스로 고안해서 재작하여, 이에 의하여 1672년에 왕립 협회의 회원으로 선출. ⇒ 케플러의 법칙
● ≪프린키피아≫의 출판 1669년, 26세 때에,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이 무렵 미분적분법과 광학에 관한 책을 잇따라 발표하여, 뉴턴의 이름은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에 런던에서 케임브리지로 찾아 온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강한 권고로, 뉴턴은 그때까지 공표해오지 않았던 만유인력에 바탕을 둔 천문학과 역학의 연구를 책으로 정리할 결심을 굳혔다. 그 책은,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제원리≫(통칭 ≪프린키피아≫)라는 표제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근대 역학을 일관되게 계통적으로 정리·완성한, 획기적인 책이었다. 뉴턴은 화학의 연구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 연금술적인 것이었음이 알려져 있다. 또 뉴턴은 신학관계의 독자적인 연구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1703년부터 1727년에 85세로 죽을 때까지 왕립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 운동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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