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1762년(영조(英祖) 38) 태어나 1836년(헌종(憲宗) 2) 사망했으며,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庵)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본관은 나주(羅州)이다.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경사(經史)를 배우고 1776년 상경, 이듬해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이벽(李檗)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지평(持平). 수찬 등을 지내고 94년 경기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켰다. 이듬해 동부승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잠입사건에 연루,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부사직. 곡산부사.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규장각(奎章閣)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99년 공서파(攻西派)로부터 천주교 신봉문제로 탄핵을 받자 자명소(自明疎)를 올리고 사직,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