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 교수|서울시립대 물리학과
진공(眞空)의 사전적 정의는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다. 이론적으로 진공을 만들기는 매우 쉽다. 충분히 두꺼운 유리판을 서로 붙여 육면체 형태로 만들고, 한쪽 면 구석에 구멍을 뚫어 여기에 강한 진공펌프를 달고 나서 유리상자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공기분자를 빼내면 된다. 말은 쉽다. 그러나 상자 속에 모든 공기분자를 완전히 빼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사전적 정의가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의 진공은 대체로 대기압보다 낮은 상태를 말한다. 대기압(Atmospheric pressure)은 말 그대로 중력에 의해 압축된 공기, 즉 대기가 만들어 내는 압력인데, 1기압(atm)이라 함은 101,325 Pa(파스칼)을 말한다. 이를 760 Torr(토르)라고도 한다. 물리를 이해할 때는 언제나 단위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1Pa은 압력의 단위인데, 1평방미터의 면적에 1N(뉴턴)의 힘이 작용할 때 느끼게 되는 압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60kg인 사람이 의 널빤지 위에 올라섰다면, 중력가속도를 단순히
으로 놓았을 때, 600N의 힘이 1평방미터에 작용한 것이므로, 이 압력은 600Pa이 된다. 여기에 비하면 1기압은 101,325 Pa이니 엄청나게 큰 압력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가 일기예보를 통해 자주 듣는 bar(바)는 100,000 Pa을 말한다. 따라서 1기압(atm)은 1 bar가 아니고 1.01325bar 또는 1013.25mbar(밀리바)가 된다. 1Torr는 1mm의 수은주압력을 말하는 것으로, 760Torr는 곧 760mmHg를 말하며 이는 곧 1기압의 정의이기도 하다. 대기압이 얼마나 센 압력인가를 설명하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므로 이제 본격적으로 진공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760Torr가 1기압이므로 1Torr면 상당한 진공상태에 해당한다. 질 좋은 진공청소기의 경우 600Torr정도를 만든다고 하니, 1Torr면 이미 엄청난 진공상태라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작은 Torr정도를 보통 고진공 상태라고 부르고
Torr를 초고진공이라고 부른다. 이 정도의 진공상태에서는 상자 속에 남아있는 분자들은 서로 간의 충돌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지구 바깥은 과연 어느 정도의 진공일까? 달 표면에 기압은
Torr정도라 알려져 있다. 즉 초고진공상태인 것이다. 좀 복잡한 계산을 해보면 이 상태의 진공에는 1입방미터에 약 1조개 미만의 분자들이 존재한다. 아마 이정도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진공상태의 한계치일 것이다.
그러면 우주공간은 어느 정도의 진공 상태일까? 우주공간의 진공 정도는 그 값이 너무 작아 Torr나 Pa 단위로 표현하기 보다는 그냥 1입방미터에 몇 개의 원자들이 존재하는 가로 나타내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행성과 행성사이의 공간에는 1입방미터에 약 천만 개의 원자들이 있고, 별들과 별사이의 공간에는 보통 100만개 정도의 원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엄청난 진공상태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은하와 은하들 사이의 공간은 거의 완벽한 진공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대략 1입방미터에 1개의 수소원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말로 텅텅 빈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자 이제 우리가 텅 빈 우주 속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단위부피당 수소원자 한 개마저도 빼어 내어 정말 어떠한 원자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진공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곳은 부피만 있을 뿐 어떠한 물질도 들어 있지 않는 공간이 될 것이다.
현대물리학이 밝힌 믿기 힘든 사실은 이렇게 만들어진 진공이 사실 텅 빈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세계에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식으로 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는 어떤 입자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도이고
는 그 입자의 운동량의 불확정도이다. 입자의 질량이 상수라면 속도의 불확정도라 해도 좋겠다. 이 두 불확정도의 곱이 0이 아니고 어떤 값을 갖는 다는 것은 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완벽하게 측정하여 알아낼 수 없다는 뜻으로 종종 해석된다. 참고로 그 어떤 값을 플랑크상수라 하고 그 값은
으로 매우 작은 수이다. 비록 플랑크상수는 작은 값이지만 0은 아니다. 그래서 만약
가 0으로 수렴한다면
는 무한대로 발산해야만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양자역학에서만 나타나는 고유의 성질이고, 만약 두 불확정도의 곱이 0이었다면 양자역학의 신비로운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만 가지고도 재미있는 많은 사실을 유추해 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수소원자는 대략 1 정도의 크기를 갖는데, 이를 바탕으로 수소원자 속의 전자의 운동 상태를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전자의 질량이
이므로
정도로, 빛의 속도에 비하면 느린 속도이지만 전자는 원자 내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원자핵을 고려하면 어떨까? 수소원자의 핵은 단순히 양성자 하나이고 그 크기는 대략
정도이다. 만약 이렇게 작은 공간에 전자가 존재한다면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전자는
의 값을 갖게 되고 이는 광속보다 빠른 상태를 의미한다. 당연히 상대성이론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전자는 원자핵 속에 안정된 입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불확정성원리의 다른 표현식은 이다. 여기서
는 에너지의 불확정도이고,
는 시간의 불확정도이다. 이 경우 만약
가 매우 작은 값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가 매우 커지게 된다는 수학공식의 해석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가 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 작아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매우 짧은 시간 간격으로 촬영할 수 있는 초고속 카메라를 생각하면 그 모습을 상상 할 수 있다. 우리가 TV를 통해 본 경험에 의하면
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우리 주변의 모든 물체들은 정지한 모습으로 관측된다. 그렇다면,
가 0에 수렴한다면 우리는 과연 사진과 같이 정지된 영상을 보게 될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불확정성의 원리를 사용하면
가 0으로 수렴하면
는 큰 값으로 발산하게 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아들여 왔던 에너지보존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매우 짧은 시간에만 에너지보존칙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이지,
가 조금만 커지더라도
는 곧 0으로 수렴하여 에너지 보존칙이 성립하게 된다.
가 커진다는 것은 임의의 값을 갖는 큰 에너지 상태도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이는 곧
에 의해 큰 질량을 가진 입자들도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무에서 시작했으므로 전하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입자와 반입자가 동시에 생성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전자와 반전자가 쌍으로 생성된다든지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가 작아질수록 우리는 깨끗한 정지영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진에 가득한 에너지 덩어리, 또는 입자와 반입자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과정을 관찰하게 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진공에 적용시키면 드디어 오늘 이야기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만, 이는 충분히 오랜 기간 관찰했을 때 얻어지는 결론이고, 만약 진공을 매우 짧은 시간만 관측한다면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입자와 반입자가 쌍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관찰하게 될 것 이다. 곧 진공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요동치고 있는 공간이 된다.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진공은 빈공간이 아니고, 입자와 반입자로 가득 찬 공간인 것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현대물리학을 소개하는 여러 대중 서적에서 인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만 역사적인 이야기 거리와 아직도 연구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빛을 전달하는 매질인 에테르가 채우고 있다고 믿어졌었던 공간, 표준모형에 나오는 모든 입자들에게 질량을 주는 힉스장도 진공의 성격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다는 진공에서 이런 다양한 물리적 현상을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물리학이 재미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