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과 화약병기의 제조

화약과 화약병기의 제조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보유하고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요체(要諦)임을 습득했다. 전쟁에서는 병력의 규모나 전략과 전술, 충분한 물자의 조달, 그리고 훈련된 병사와 장수의 통솔력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무기였다.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개발하는 것은 개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이다.

 

역대 전쟁에서 무기의 성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우수한 무기는 한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대 우리나라의 군사들의 주무기는 궁시였고, 이후에는 활과 칼, 창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화약과 화약병기가 출현하면서 이후의 전투양상은 새롭게 변했다.

 

 

최무선, 조선에서 화약의 시대를 열다

우리나라에서 화약병기는 14세기 중엽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전래된 이후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화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곧 화약을 자체 생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 수준에 차이가 있었지만 동양권은 이미 금속활자 문화의 단계에 있었으므로 화기를 주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관건은 화약을 어떻게 제조하느냐였다.

그림 1 화약의 주요 성분은 유황, 목탄, 염초 세 가지였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 작가 김화연

 

예로부터 중국은 화약 제조법을 극비에 부쳐 그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는 중국이 주변국가보다도 우세한 무기체계를 유지하려는 데서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화약의 주요 성분은 유황(硫黃), 목탄(木炭), 염초(焰硝) 세 가지였다. 이 중 유황과 목탄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염초만은 화학적 기술로 제조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화약의 제조는 염초의 제조 여부에 그 열쇠가 달려 있었다. 중국 대륙이 원과 명의 교체기를 겪으며 화약제조기술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지자, 그 틈을 타서 고려도 화약의 제조법을 습득했다.

 

그간 염초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최초로 실용성 있는 염초의 제조법을 습득한 사람은 최무선(崔茂宣)이었다. 당시 고려는 왜구의 노략질로 큰 피해를 당하고 있어 화약병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최무선은 이원으로부터 염초 제조의 비법을 배워 화약 제조에 성공했다. 화약 제조 기술은 한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될 수 있었지만, 그것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국가적 차원의 후원과 정부의 역할이 필요했다.

 

최무선은 자신이 제조한 화약을 시험해보고 자신을 얻어 조정에 화기 제조기관 설치를 건의했다. 그 결과 고려 우왕 3년(1377) 10월 화통도감(火都監)이 설치됐다. 화통도감은 화약과 화통을 만드는 일을 하던 임시 관아로 고려가 화약의 자체 생산, 그것도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고려는 동양권에서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의 화기 보유국이 됐다. 화통도감에서는 각종 화기와 발사물이 제작돼 화약과 화기 제작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림 2 최무선이 제작한 신기전과 화차.

1448년(세종 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끝 부분에 화약이 부착된 화살 여러 개를 한꺼번에 쏘는 병기다.

ⓒ 위키피디아

 

이후 최무선은 화기를 적재하고 활용할 전함을 건조하는 일을 담당했다. 고려는 일찍이 일본 정벌전을 통해 전함 건조 경험을 인정받은 바 있었다. 이미 공민왕대에는 전함을 건조하고 그 전함에서 화통을 발사한 예도 있다. 최무선은 종래의 고려 전함이 가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해 새로운 전함인 누선을 건조하기도 했다.

 

화기로 무장한 고려의 전함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한 전투는 1380년(우왕 6)의 진포해전과 1383년의 남해 관음포해전이다. 진포해전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최초로 치른 해전이다. 특히 세계 해전술상에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돼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투였다. 이후 고려는 해전에 자신감을 얻어 종래의 수세적이었던 왜구 토벌작전을 적극적인 공격전략으로 전환했다. 나아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화기 개량

고려 말 급속하게 발전하던 화약병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일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대외 방어전략 측면에서 적극 개발됐다. 최무선의 화약과 화기 제조술은 그의 아들인 최해산에게 전승됐고,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됐다.

 

특히 세종은 북방의 4군 6진 영토 개척을 위해 화약과 화기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대대적인 화기 개량을 단행했다. 주목적은 화기에 쓰이는 화약은 적게 쓰면서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1448년(세종 30) 9월에는 화약과 화약병기를 전문화, 규격화하기 위해 ≪총통등록(銃筒謄錄)≫이 편찬되기도 했다.

 

또한 세종대에는 화기 사격법의 개혁도 이루어졌다. 사격을 하는 사수와 장전을 해주는 보조가 분업을 통해 보다 전문화된 화기의 전술적 운용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조선의 화약과 화기 제작기술은 국제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 전반 세종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우리나라 화기의 발전추세는 문종이 즉위한 후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문종은 즉위년 9월, 화약 발달의 중요한 요소인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을 크게 개량했으며, 각 도에 책임 제조량을 할당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확한 화약 제조기술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동의보감≫에 ≪의학입문(醫學入門)≫에서 인용한 염초의 제법이 있는데, ≪천공개물(天工開物)≫에 기록된 흙의 자연표면을 정화시키는 단순한 방법과 같다. 또한 1451년(문종 1년) 1월에는 화차(火車)와 같은 다연장발사기를 개발했는데, 전국 각지의 병영에 배치해 실전에서 운용케 했다.

 

그러나 이후의 화기제작 기술은 조정의 엄격한 관리와 지나친 통제책,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를 틈탄 무사안일주의적 국정 운영으로 인해 점차 쇠락해 갔다.

 

 

화약의 위력을 확인한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의 화약과 화기 기술을 뚜렷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전쟁 초기에 조선군은 육전에서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보병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연패를 거듭했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조선군의 소형화기에 비해 월등하기도 했지만, 조선군은 조총을 이용한 보병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전 1개월도 안 돼 수도 서울이 함락당해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고 국토의 대부분을 잃는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조선은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과 수군의 활약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구가했다. 조선 수군이 연승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형 화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황자총통 등 다양한 대형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대형화포를 이용해 함포전술(艦砲戰術)을, 전함을 이용한 당파전술(撞破戰術)과 화공전술(火攻戰術)을 구사했다. 특히 조선 수군이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화포의 사거리 덕분이었다. 조선군의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어, 가까이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군은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피아(彼我) 화기의 성능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조선은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길은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 화기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개발된 화기가 화승식화기인 조총을 비롯해 호준포(虎砲), 불랑기(佛狼機), 삼안총(三眼銃), 백자총통(百字銃筒) 등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화기에 적합한 군사가 편제되고 전술이 개발됐다.

 

 

화기의 안정화와 대량생산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국방의 중요성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증가했다. 그에 따라 화기기술에 대한 지식이 널리 보급됐고 무기생산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높아졌다. 따라서 화기 제작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으로 조총청(鳥銃廳)이 설치돼 조총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화기 제작의 중요성은 점차 커져 광해군 6년(1614)에는 조총청이 화기도감(火器都監)으로 확대 개편됐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조총의 우수성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청나라에서 조선의 조총과 조총병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 받기도 했다.

그림 3 보존처리된 별승자총통.

맨 아래 총통에서 심지 탄환 및 화약이 나와 임진왜란 당시 화포 및 화약연구에 큰 진전이 있게 됐다.

ⓒ 동아일보

 

그러다 16세기 ~ 17세기 초에 화약제조 공정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는데, 이는 1635년(인조 13) 저술된 ≪신전자취염초방≫과 1698년 저술된 ≪신전자초방≫에서 확인된다. ≪신전자취염초방≫은 성근(成根)이 중국에서 배우고 스스로 연구해 완성한 화약제조방법을 이서(李曙)가 국문으로 번역해 간행한 책이다. ≪신전자초방≫은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숙종 때 북경에서 연구한 화약 제조법을 기록하고 그 방법을 얻기까지의 유래를 자세하게 설명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화약 제조법은 몇 가지의 중요한 새로운 방법을 밝힘으로써 화약의 효율을 높이고 성능을 좋게 개선했다. 여기서 화약은 염초 1근에 버드나무재 3냥과 유황가루 1냥 3전(錢)을 섞어서 제조됐는데, 이러한 흑색화약 제조 방법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화약 원료의 배합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칼 보다 붓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었지만, 주변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준비와 지혜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되찾았다. 화약과 화약병기에는 이러한 선현들의 피와 땀과 노력,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했던 그들의 지혜와 과학성이 흠뻑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글 /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umma621@hanaf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