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에서 지상으로, 태양전지의 승리 ④] 좋긴 한데, 믿을 수 있을까?

당시 미국의 로켓 개발 계획은 중구난방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의 육군과 해군, 공군은 서로 군 내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때로는 이런 신경전이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곤 해서 공군에서 도입한 항공기를 해군은 수령을 거부하는 식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로켓 기술도 마찬가지로 육해공군이 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진하느라 자원이나 인력 낭비가 심한 편이었다. 초기 우주경쟁에서 소련이 우위를 점했던 것도, 미국과 달리 단일한 체계하에 효율적으로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통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선정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의 주역이 해군의 뱅가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육군과 달리 해군은 태양전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글러는 당장 해군으로 쫓아가서 태양전지를 인공위성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진 미완성이고 안정성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뱅가드 1호에 적용된 태양전지 모듈. 작은 태양전지판 여러 개를 모은 것이다. ⓒUC Santa Barbara


 


지글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해군은 육군과 공군을 찍소리 하지 못하게 할 만한 당장의 성과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태양전지라는 신기술이 충분히 테스트되어 최대한 빠른 시간에 실용화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주개발에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때라 인공위성에 성공적으로 적용해서 제대로 작동해준다면 태양전지 연구는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다행히 민간 과학자들도 이러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주개발은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신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프로젝트였으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었다.


 


지글러는 저명한 과학자들을 설득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소속인 지글러의 발언과 민간 과학자들의 발언은 파괴력이 달랐다. 과학자들은 곧 여론을 움직였으며 여론은 다시 육군 통신대가 인공위성에 부착할 태양전지 시스템 개발을 담당하게 하도록 해군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해군은 여론에 밀려 뱅가드 위성의 전원을 태양전지로 결정하고 이를 육군 통신대에 맡겼다.


 


육군 통신대는 곧 벨연구소에서 라이센스를 얻어 태양전지를 생산하던 호프만 전자회사와 접촉했다. 육군 통신대가 세부 사양을 정하면 이에 따라 호프만 전자회가가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길이가 고작 1cm도 되지 않는 태양전지판이었지만 여러 장 모으자 위성을 움직일 정도의 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을 한데 모아 충격이나 대기와의 마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화유리로 보호한 케이스에 넣어 실제 위성에 부착할 태양전지 모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최초의 태양전지를 검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글러 박사와 연구진은 익스플로러 1호의 모형에 태양전지 모듈을 붙여 고고도에서 낙하하는 실험을 반복하여 신뢰성을 확보했다. ⓒUC Santa Barbara


 


문제는 신뢰성이었다. 우주 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발사시의 충격이나 고온에 견딜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두 대의 미사일 탄두부분에 태양전지 모듈을 부착하고 발사하는 실험까지 했고 성공도 했지만 해군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입장이었다. 해군의 대변인은 계속해서 최초 네 대의 위성은 전통적인 방식의 화학전지를 전원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해군 입장으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라는 막대한 중책을 수행하느라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판국에 이제 막 테스트를 시작한 기술을 전력공급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학전지가 무겁고 수명이 짧기는 했지만, 거의 확실하게 정상 작동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태양전지 모듈을 부착하고 보조전원으로 화학전지도 가져가자니 가뜩이나 빠듯한 페이로드가 모자랄 판이었다. 그리고 뱅가드 프로젝트의 칼자루는 어디까지나 해군이 쥐고 있었다. (…계속)


 


김택원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