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 Brazil (1985년)

브라질 / Brazil (1985년) 

개인적으로 코믹하면서도 깊은 메시지가 있는 SF 영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역시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입니다. 국내에는 [여인의 음모]라는 다소 황당한 제목으로 알려졌다고 하는데 아 왜~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아무튼, 이 영화의 워킹 타이틀은 1984와 2분의 1이었다고 하지요. 조지 오웰의 ‘1984’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2분의 1’에서 강한 영감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고전을 볼 때 그 당시에는 재미있었는데 ‘다시 보니 아니다.’와 ‘다시 보아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로 나뉠 때가 있지요.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그랬습니다. 다른 걸작 영화들을 접했을 때 느꼈던 ‘역시 다시 보아도 재미있다.’라는 느낌. [브라질] 역시 강한 서브 텍스트로 무장하고 있고, 그것은 즉, 당시 흐름(trend)보다는 자신이 말하려는 메시지에 충실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감독이 말하려는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은 시간과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서는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레트로(복고풍) 퓨처리즘(미래주의)의 세계   

이 영화는 앞서 언급을 했지만 ‘1984’의 통제와 펠리니의 ‘8과 2분의 1’의 개인의 자아에 대한 탐구가 그려집니다. 그 위에 테리 길리엄 스타일의 블랙 코미디와 슬랩 스틱 그리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판타지 요소까지 교묘히 섞어 큰 재미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블랙 코미디를 볼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부분이 바로 풍자라는 요소입니다. 테리 길리엄은 블랙 코미디에 슬랩 스틱 그리고 자유를 향한 인간의 내제된 욕망이라는 부분에서 가히 최고의 점수를 줄 만한 연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는 20세기, 장소는 어느 곳인데 바로 이 설명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테리 길리엄은 같은 20세기이지만 우리와는 뭔가 다른 평행우주관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듯 보여주다 결국은 우리의 이야기라는 역설로 마무리합니다. ‘브라질’의 세계는 현실과는 다르게 발전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에서 현재를 상상한 레트로 퓨처리즘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뺏는 조그만 TV 브라운관과 20세기 초 사람들이 상상한 것과 같은 현재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게 됩니다. 이는 개혁보다는 불합리한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고 성장해버린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테리 길리엄과 거대한 건물로 대표되는 권력과 오류투성이의 시스템, 그리고 약하디약한 개인, 영화에서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가 주요 화두로 등장합니다. 1984년의 세계와 같이 통제가 강한 세계와 그 체제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유에로의 욕망, 사회의 풍자가 영화 전반에 얼룩져 있습니다. 아래 출판국 시퀀스는 감시 시스템을 통렬히 풍자합니다. 슬랩 스틱 스타일의 연출로 감시 시스템의 불합리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독재와 감시 시스템 자체가 코미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통제 시스템의 불완전성과 풍자 

자유가 통제된 사회 기관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파리 한 마리 탓에 오류가 발생할 정도로 허술하기만 합니다. 영화 시작은 인쇄기에 파리 한 마리가 추락해 터틀이 버틀로 잘못 표기가 되면서 주인공의 자아 찾기 모험(?)이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이 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샘이 일하는 출판국은 샘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시스템의 오류 때문에 엉뚱한 사람을 잡아온 출판국은 위기를 맞게 되고 보스는 샘을 찾습니다. 그 시간 샘-기 센 어머니 덕에 사랑 없는 결혼을 했으며 원치 않는 승진으로 나날이 힘든-은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고, 꿈속에서 이카로스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다 생면부지의 정인과 만나게 됩니다. 이 꿈은 예지몽으로 샘이 꿈속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레트로 퓨처리즘 풍의 전화기가 울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고 그는 자신이 늦잠을 자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도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이 오작동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회 시스템을 풍자합니다.

 

낡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그럴듯한 모습으로 가장하는 디스토피아 사회 

샘이 일하는 출판국은 혼돈 그 자체인 듯 온통 왁자지껄합니다. 부호인 어머니에게서 독립한 샘(체제에 대한 반항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은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겉으로는 이상 없어 보이지만 이제 낡을 대로 낡아 통제 불능 상태(혹은 불합리한 상태)로 치닫는 디스토피아 통제 사회의 허상과 이에 대한 반발 같습니다. 이 설정은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했다기보다는 오류투성이의 낡디낡은 시스템을 겉만 살짝 바꿔놓은 듯한 불완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설정은 샘의 어머니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성형 시술을 받음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늙고 죽어가는 정신(혹은 통제 시스템)을 성형을 통해 겉만 바꾸려 한다는 것이지요.

 

 

주인공의 자아 찾기 

샘은 보스를 대신해 버틀의 집에 방문하면서 자아 찾기를 시작합니다. 샘은 자신의 예지몽에 등장했던 그녀가 버틀의 집 이층에 살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영화는 꿈과 현실을 오가게 됩니다. 펠리니의 8과 2분의 1의 느낌을 강하게 받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지몽의 그녀이자 샘의 운명의 그녀를 찾기 위해 샘은 정보국으로 보직을 변경합니다. 그에게는 위치 상승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한, 즉 자아를 찾기 위한 행동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출판국보다 한 단계 위인 정보국은 조용하고 엄숙합니다. 사무실 크기도 이전보다 좁지만, 출세를 위해 아부하는 사람들은 더 많이 모인, 그들만의 집합소, 정보국. 과연 샘은 시스템으로부터 질을 구하고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영화는 마지막까지 풍자와 냉소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바라며 추천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 영화가 왜? SF 영화 장르에 포함되느냐?’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을 드리면, 이 영화는 코미디와 같은 통제 시스템과 그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이언스 픽션(Science-Fiction)’은 광선총과 같은 물리적 과학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사회 과학’ 즉, 사회 풍자도 넓은 범위에서 SF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포스트 묵시록적인 영화도 ‘사이언스 픽션’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사회 과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그 명칭만 다르리라 봅니다.  

 

다시 영화 내용으로 돌아와서, 코미디 같은 불합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과 그 속에서 자유를 꿈꾸는 주인공의 모습은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거대 난센스 사회 속 개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러한 서브 텍스트들이 테리 길리엄식 장치들과 함께 유기적으로 잘 묶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영화가 끝난 후 주인공과 함께 ‘브라질’을 읊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제가 테리 길리엄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글_유상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