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 – 조상들의 통신 네트워크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전화나 핸드폰 같은 통신기기가 없던 시절, 외적이 국경지역에 나타나면 어떻게 소식을 전했을까?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올라가면 아궁이가 함께 붙어 있는 5개의 화두(火竇 : 불을 피워 바깥으로 비치게 하는 구멍)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통신 수단인 봉수이다.


 


 


조선 시대의 통신 수단 봉수



그렇다면 머나먼 국경지역에서 보내는 신호가 한양까지 도달하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함경도나 평안도의 국경지역에서 오후에 봉화를 올리면 해질 무렵에 남산과 가장 가까운 아차산 봉수대에 도달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대략 전달 속도는 1시간에 100Km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12시간이면 전국 어느 곳에서 보낸 신호든지 한양에 도달하였다.


 







봉수는 밤에는 횃불(口, 봉)로, 낮에는 연기(燧, 수)로써 신호를 전달하던 통신 시스템이었다. 이 봉수는 군대의 이동 상황이나 적의 침입에 대한 정보를 임금이 있는 조정에 전해주던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또한 봉수는 변방의 위급상태를 중앙에 알려주는 기능 외에도 국가의 치안상태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였다. 1홰(炬)의 봉수 신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였으므로, 당시의 한양 사람들은 통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목멱산(현재의 남산)의 봉수가 올라가면 하루가 무사하게 지났음을 알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봉수는 신호를 보내는 곳과 받는 곳 상호 간에 약속된 신호 규정에 따라 통신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신호 방식은 횃불이나 연기의 개수가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디지털 신호였던 셈이다.


 


 


봉수의 발전



우리나라의 봉수 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신하 유천간(留天干)으로 하여금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를 횃불로서 안내하였다는 기록에서 봉수의 유래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봉수 제도를 갖추게 된 것은 세종대왕부터이다.


 


세종대왕은 기존 중국 및 고려 시대 때 운영되었던 봉수 제도를 참고하여 각 도의 망 보기 좋은 산봉우리에 연대(煙臺 / 일반적으로 높이가 7.5m, 둘레가 21m나 되는 단층 시설로서 주변에는 목책(木柵)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고, 봉군(烽軍)을 보호하던 역할을 했음) 또는 봉수대를 높이 쌓고 근처에 사는 백성 10여 명을 모집하여 봉졸(烽卒)로 삼았다. 봉졸은 3인이 1조로 구성되어 병기를 가지고 항상 그 위에서 주야로 정찰하며 5일 만에 교대하게 하고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급히 알리도록 하였다. 초기 봉수제도의 시작이었다.


 


이후 세종대왕은 봉화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보완하여 체계를 크게 개선하였다. 이는 봉졸 인원수 확대, 봉수를 4거에서 5거로, 전국의 봉수 노선을 1로(路)에서 5로(路)로 나눈 것 등이다. 이러한 봉수대는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약 643개의 장소에 설치되었다. 봉수의 전달 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앙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국경지역으로 내보내는 분산식으로도 운영되었다.


 


 


조선 시대의 5대 봉수로



조선 시대 전국의 봉수망은 5대 기간선로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을 소개하면 이렇다.


 












   1로 : 함경도 경흥 → 강원도 → 경기도 → 양주 아차산봉수
   제 2로 : 동래 다대포 → 경상도 → 충청도 → 경기도 → 성남 천림산 봉수
   제 3로 : 평안도 강계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동봉수
   제 4로 : 평안도 의주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서봉수
   제 5로 : 전남 순천 → 충청도 → 경기도 → 서울 개화산 봉수




 












이렇게 모인 봉수는 최종적으로 한양의 목멱산(남산) 봉수대로 집결되어 그 소식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제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제2로, 5로는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여 이에 대비한 것이었다. 봉수에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가 있다. 직선봉수는 기간선로의 것이고 간선봉수는 그 보조선을 말한다. 또 봉수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남산에 설치한 경(京)봉수와 바닷가나 국경의 해안선을 따라 전달되는 연변(沿邊)봉수 그리고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지(內地) 봉수로 나뉜다.


 


봉수의 신호방식



봉수의 신호방식을 보면 평상시에는 1개의 홰(봉수 신호)를,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접전 중이면 5홰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면 안개나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과 같이 기상환경이 좋이 않았을 경우 어떻게 연락을 취했을까? 문헌에 따르면 화포나 나팔 등과 같은 소리를 이용하여 전달하기도 하였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경우 깃발이나 봉수군이 직접 다음 연락 지역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에 따라 인재(人災)가 발생하듯이 봉수의 운영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즉 적이 나타나거나 위협의 징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화를 하지 않거나 심지어 근무태만으로 인한 처벌이 두려워 봉수를 두고 도망간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고자 조선 조정에서는 봉수군의 기강과 징계와 관련된 여러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숙종시대에 편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그 처벌규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적이 출현하거나 국경에 가까이 왔을 때 거화하지 않은 경우 70~100대에 이르는 장형(볼기)에 처했으며, 적의 침입을 보고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봉수군의 근무 태만은 날로 늘어났다.


 


봉수 무용론의 대두













봉수는 그 중요성과 역할에 비추어 국가의 안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정작 제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오보로 잘못 전달되어 폐해가 많았다. 예를 들어 1510년 삼포왜란 시에도 불을 올리지 않았고, 1513년 왜적이 인천, 충청과 전라지역에 침입하여 20여 일간을 체류하였어도 봉화를 올리지 않았다. 특히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 달이 넘도록 그 일을 알리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끊어졌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봉수무용론과 봉수의 폐단을 주장하는 일이 늘어나고 급기야 1605년(선조38년)에는 파발제(말을 타거나 사람이 직접 달려서 소식을 전하던 통신 방법)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한양 입성과 동시에 왕궁과 관아를 모두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남산 북쪽 산허리 봉수대를 파손하고 그들의 진지인 왜장대(성)를 쌓았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봉수는 임진왜란 이후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렇게 삼국시대 이래로 부침을 거듭하던 봉수는 1885년 전신, 1890년대 전화 등의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봉수의 순차적 신호 전달 체계는 현대의 마이크로파 통신과 비슷해   



봉수의 순차적인 신호 전달체계 방식은 마이크로파를 이용한 오늘날 무선통신 방식과 유사하다. 마이크로파는 파장이 짧아서 빛과 유사하게 직진한다. 따라서 전파를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이 서로 눈에 보여야 통신이 잘된다. 그래서 먼 거리까지 마이크로파 통신을 하려면 중간마다 봉수처럼 중계소를 세울 필요가 있다. 대부분 산꼭대기 정상에 있는 봉수대는 오늘날 마이크로파 통신 중계소 위치와 약 20% 일치하는데, 영덕의 대소산 봉수, 울산의 부로산 봉수, 음성의 가엽산 봉수, 제천의 오티 봉수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손성근 / 국립과천과학관 전시기획총괄과 연구사


자료제공 국립과천과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