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


< 멘델 >

오늘날에도 <멘델의 법칙>이라고 그 이름을 붙여서 불리는 유전의 근본법칙을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학자. 본업은 수도원의 사제였다.

유전연구의 동기
농가에서 태어난 멘델은 향학심에 불탔으며,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1844년에 브륀(현재는 체코령 브루노)의 수도원의 사제보가 되었는데, 그레고르라는 이름도 그 때 알았다. 3년 후에 사제가 되었으며 1868년 46세 때에 원장이 되었다.

1851년, 29세때부터 2년간 멘델은 빈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자연과학의 많은 학과와 수학 등 많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폭넓은 지식을 얻었다.
멘델이 특히 흥미를 가진 강의 중에 웅거의 식물학이 있었다. 웅거는 진화론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마침 멘델이 유학중이던 1852년에, 그 저작《식물계의 역사의 시론》이 출판되었다. 멘델이 들은 강의 중에 진화론에 관계된 문제가 있어, 멘델의 잡종 연구에 동기를 준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식물잡종의 실험

빈에서 수도원으로 되돌아온 2년 후인 1854년부터, 그는 완두콩을 재료로 한 유전 연구를 시작하였다. 수도원의 마당에서 완두콩을 재배하여 여러 가지의 성질이 어떻게 유전해 가는가를 알아보았다. 그는 종자가 둥근 것과 주름이 있는 것, 떡잎이 노란 것과 녹색의 것, 줄기가 긴 것과 짧은 것이라는 식으로, 7쌍의 성질을 골라내어 이들 쌍의 성질(현대의 용어로는 대립형질)이 식물의 교배로 어떻게 전해져 가는가에 대하여 수많은 실험을 하고, 통계를 내어 결론을 내었다.
멘델의 연구가 성공한 하나의 이유는 이와 같이 대립형질을 골라서 교배하여, 그 결과를 알아본 데에 있다. 그것으로 우성의 법칙, 분리의 법칙을 밝혀내었다.
멘델 이전에 유전 연구가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던 것은 여러 가지 성질이 서로 관계된다고 생각하여, 대립형질로 나누어서 알아보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 중대한 원인이었다.

실험 결과가 성공적인데는 그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알아보았다는 것도 성공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분리의 법칙의 기본인 분리비는 이 통계에 의한 연구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완두콩이라는 자가수분의 식물을 재료로 선택한 것도 중요하다. 분리비의 실험에는 이 사실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이리하여 유전의 근본 법칙이 멘델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는 우성·열성의 형질을 맡고 있는 유전의 근원을 요소(엘리먼트)라 불렀다. 후에 말하는 유전자에 해당한다. 멘델의 연구는 1865년 초에 브륀의 학회에서 발표되어, 《식물잡종의 실험》이라는 논문이 학회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멘델의 법칙의 재발견

멘델의 중요한 발견은 당시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지방 학회의 기관지였던 탓도 있지만, 멘델이 잡지를 보낸 당시의 학계의 권위자에게도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였다. 멘델은 그 후 다른 식물을 재료로 한 연구 등을 했지만 수도원장의 일에 쫓기어 전력을 쏟을 수 없었다.
멘델은 1884년에 죽었는데, 그 후도 16년간이나 그의 업적은 묻힌 채로 있었다. 그런데 1900년에 이르러 극적인 사건이 학계에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드 프리스, 독일의 코렌스,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라는 국적이 다른 세 사람의 과학자가 같은 해에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한 것이다. 재료는 각각 달랐지만 결과는 35년 전에 멘델이 얻었던 것과 똑같았다. 과거의 연구를 알아보고 있는 중에 멘델의 파묻힌 논문이 발굴되어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리하여 금세기에 들어서, 멘델의 법칙과 생각을 기초로 한 유전학은 멘델 유전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급속히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