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연구실] 두 과학자 이야기, 석주명과 김용관

유행하는 수식어 중 ‘한국형’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 특유의 문화와 분위기, 사회상을 담은 산물을 말한다.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들은 으레 다른 나라의 것들과는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석주명은 조선 팔도의 나비를 최초로 정리한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과학에도 한국형 과학이 있었으니, 바로 석주명과 김용관이다.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에 ‘한국형’이라고? 의문스럽다면 생물학을 생각해 보자. 한국의 토종 개구리는 미국에서 발견할 수 없다. 한국에만 나는 자생 잡초는 몽골 고원에서 찾아봐야 볼 수 없을 것이다. 생물학에서처럼, 과학에도 일종의 향토색이 있는 것이다. 석주명은 나비로, 김용관은 과학과 기술의 관계와 발전전략으로 향토색을 드러냈다.


석주명은 일생을 나비 연구에 바친 생물학자다. 그는 조선의 나비가 제대로 분류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선에 있는 나비 분류에 뛰어들었다. 그가 분류한 나비들은 총 255종으로 자신의 연구 자료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1940년, 뉴욕에서 <조선산 나비류 총목록>을 발간했다.


석주명의 연구는 단지 나비를 분류했다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조선 나비를 분류하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수립함으로써 후대의 학자들이 토종 나비를 쉽게 분류할 수 이쓴 체계를 짰다. 그가 조선 각지를 발로 뛰여 연구한 자료들은 결국 ‘한국적인’ 생물학을 창시한 셈이다.



김용관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의 산업기술 향상을 통해 자주적인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석주명이 생물학에서 ‘조선학’을 체계화하던 1930년대에는 ‘조선과학운동’이 활발했다. 식민지의 현실을 직시하고 조선인들이 힘을 키워 독립에 이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철학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대표적인 움직임이 1934년에 열린 ‘과학데이’ 행사였다. 과학의 날의 전신이 된 과학데이와 함께 과학지식보급회도 조직되었다. 과학지식보급회는 조선의 민중들에게 과학지식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를 내걸고 활동했다.


이처럼 다양한 움직임을 이끈 사람은 1924년, 발명학회를 창설한 김용관이었다. 그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려면 공업력을 향상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만의 공업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발명을 장려하고 발명가를 지원하였다.



1920년대, 발명학회에서 내던 과학조선


 


안타깝게도 조선 총독부는 요지부동이라 1938년까지 조선의 학교에 이공계 학과를 설치하지 않았다. 조선의 과학기술을 일본에 영구히 종속시키려는 의도였다. 김용관은 이러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으나 여러 노력에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을 이룬 지금, 과학의 날에 그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세경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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