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정직

서민 교수|단국대학교

 

영화 <제보자>가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큰돈을 들인 블록버스터가 아님에도 관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비결은 그 영화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치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국익을 창출하리라 믿었던 연구가 조작으로 판명된 것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대한민국이 휘청거릴 만큼 떠들썩한 사건이었으니, 아직도 많은 이가 황박사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은 채 이런저런 음모론을 믿는 것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계에 몸담은 사람들 대부분이 황박사에게 등을 돌리는 이유는 과학자에게 있어서 정직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비밀이 없다

코카콜라를 만드는 회사에는 콜라 맛의 비밀을 아는 직원이 두 명 있는데, 그 둘은 절대로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단다. 어릴 적부터 들은 얘기인지라 그 직원이 지금 살아 있는지, 아직도 그러고 사는지 잘 모르겠다만, 이 얘기는 과학과 기업이 얼마나 다른지 잘 말해 준다. 기업에서 자기 제품의 비결을 외부에 유출시키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다른 회사보다 앞서는 뭔가가 있어야 제품을 판매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과학계는 기업과 달리 자기만의 비밀 같은 게 없다시피 하다. 기업이 그런 것처럼 과학자들도 나름 경쟁을 하는 존재니 자기만의 비밀이 없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서민이라는 과학자가 위대한 실험에 성공했다고 해보자. 과학계의 모든 일은 논문을 통해서 검증을 받아야 하니, 그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논문으로 써야 한다. 논문은 서론-방법-결과-고찰의 순서로 구성된다. 서론에는 이 연구를 하게 된 동기를 설명한다. 결과는 실험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나열하는 곳이고, 고찰에서는 자신이 얻은 결과물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위대한 것인지를 자랑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말 그대로 이 연구를 하면서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어떤 기계로 그 재료들을 요리해서 지금의 결과로 만들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는 곳이 바로 ‘방법’이다. 재료는 어느 회사에서 샀는지, 조리할 때 쓴 기계는 어느 회사 것인지 까지 논문에 적어야 한다. 비법을 공개하기 싫은 나머지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신비의 가루”를 썼다면,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물론 논문에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쓸 수는 없다. “소금을 5g 넣었다”고 썼지만, 2g을 먼저 넣고 나중에 3g을 넣었는지, 5g을 한꺼번에 넣었는지까지 쓰기는 지면이 부족하다. 그리고 실험이란 상당히 예민한 작업이라, 어떤 방법으로 소금을 넣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여기까지 읽고 “뭐야? 비밀이 없다더니?”라고 볼멘소리를 할 분도 계시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면문제일 뿐, 일부러 밝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논문에 실린 방법대로 했는데 결과가 똑같이 나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논문의 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따라했더니 안되더라. 무슨 비법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보거나 저자의 실험실로 찾아가 배움을 청하는 것. 그 둘이 일면식도 없을지언정, 저자는 그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이게 바로 과학자의 세계다.

페니실린은 플레밍만의 업적이 아니다

과학자가 이렇게 모든 방법을 공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혹시 논문 저자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검증을 해보고픈 욕구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 왜 방법을 공개하는가? 과학이란 게 공통의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회충을 예로 들어보자. 회충은 아주 온순한 기생충이라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지만, 변종회충이 등장해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럴 때 과학자의 목표는 당연히 변종회충을 한 알로 죽일 수 있는 강력한 구충제의 개발이다. 이 때 A라는 과학자가 회충을 기절시키는 약을 만들어 냈다. B라는 과학자는 기절한 회충을 질식시키는 약을 만들어 냈다. A의 약은 회충을 잠시 기절시킬 뿐이고, B의 약은 오직 기절한 회충에만 효과가 있다. A와 B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연구를 해봤자 변종회충으로 죽는 이만 늘어날 뿐이다. 하지만 그 둘이 논문을 통해 정보를 공유한다면 변종회충을 완벽하게 퇴치할 수 있다. A나 B 모두 변종회충의 박멸이 공통의 목표니, 정보 공유는 둘 모두에게, 그리고 인류에게 두루 좋은 일이다. 이 둘의 논문에서 힌트를 얻은 C가 기절하지 않은, 멀쩡한 회충을 질식시키는 약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D라는 과학자가 회충을 완전히 기절시켜 영원히 못 깨어나게 만드는 약을 발명할 수도 있는 일이다. C와 D 모두 앞선 연구자들의 연구 덕분에 이 약을 개발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를 한다. 그게 바로 참고문헌으로, 이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앞선 연구들의 도움을 받았고, 후세 연구자들도 내 연구를 발판으로 더 멋진 약을 만들어주기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과학계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플레밍 (A. Fleming). 그는 세균을 배양하던 배양접시의 뚜껑을 닫지 않고 휴가를 다녀왔다가 푸른곰팡이에서 세균을 억제하는, 훗날 페니실린으로 불리게 될 물질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불행히도 그 시절에는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뽑아내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플레밍은 그 사실을 혼자만 간직하는 대신 논문으로 써서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 그 논문을 본 이들은 페니실린을 뽑아내는 방법에 매진했고, 결국 11년이 지난 뒤 체인 (E.B. Chain)과 플로리(H.W. Florey)이 인류 최초의 항생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체인과 플로리의 업적은 당연히 플레밍의 논문에빚지고 있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플레밍의 발견이 빛을 발하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고, 그 동안 페니실린으로 살릴 수 있었던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으리라. 그래서 그 셋은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는데, 이후 플레밍이 했던 말은 꽤 감동적이다.

“세상은 나더러 페니실린을 만들어 낸 사람이라고 칭찬하지만,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푸른곰팡이는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며, 페니실린도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지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있다면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밖에 없습니다.”

과학자에게 정직이 중요한 이유

비슷한 주제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은 경쟁자이면서 협력자다. 경쟁자인 이유는 먼저 그 일을 해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고, 협력자인 이유는 조금 앞서나간 사람이 “너희들, 빨리 따라와!”라며 다른 과학자들의 손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폭이 넓은 냇가를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를 놓는다고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징검다리를 놓으면 그 다음 사람이 그 징검다리를 밟고 또 다른 징검다리를 놓는다. 그렇게 징검다리가 쌓이게 되면 후세의 누군가가 그 다리를 밟고 공통의 목표였던 건너편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징검다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놓으면 어떻게 될까? 건너편 기슭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대신 일련의 과학자들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코스를 틀어 버린다. 예를 들어 변종회충에게 시금치를 먹이면 효과가 있다는 논문을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발표한 과학자가 있다고 해보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시금치를 원료로 해서 변종회충을 죽이는 약을 개발하려고 할 것이다. 한두 명이 ‘어? 이상하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논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변종회충약의 개발은 그만큼 늦어진다. 전혀 엉뚱한 곳에 놓인 징검다리, 그게 바로 논문조작이다. 각 직업마다 해서는 안 될 일이 존재할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주가조작이 중대한 범죄며, 스님은 살생을 하는 게 최악이 범죄이리라. 과학계에서 이에 맞먹을 범죄는 바로 논문조작이다.

과학자로서 실험을 하다보면 가끔씩 논문조작의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변종회충에 감염된 쥐가 더 많이 죽어야 하는데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쥐들이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걸 보면 갑갑하다. 쥐가 좀 죽어줘야 논문을 쓸 수 있으니 목이라도 조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목을 조르는 순간 그는 실험결과를 조작한 사람이 되고, 후세 연구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파렴치범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니까. 갑자기 2년 전에 했던 연구가 생각난다. 그때 난 멧돼지에 선모충이라는 기생충이 얼마나 감염돼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었다. 120여마리의 멧돼지를 잡아서 조사를 해봤지만, 선모충은 단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선모충의 감염률이 낮았던 탓으로, 겨우 100여마리를 조사해서 선모충을 찾겠다는 게 과욕이었던 거다. 연구비를 받아 수행한 연구였던 만큼 보고서를 쓰려면 최소한 한 마리쯤은 나왔어야 했다. 그때 학생실습을 위해 보관된 선모충을 사진으로 찍어 멧돼지에서 나온 것처럼 속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차피 우리나라에는 멧돼지 육회를 먹고 선모충에 감염된 환자들이 꽤 있었으니, 그런다고 해서 큰 피해를 가져오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난 그냥 선모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썼고, ‘당분간 연구비 신청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C등급’을 받고 말았다. 이게 내가 특별히 윤리적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모든 과학자가 그 상황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다시 황우석 박사

황우석 박사가 2005년 <사이언스>지에 쓴 논문은 솔직하지 못했다. 우선, 불법매매된 난자를 정당하게 취득한 난자인 것처럼 속였다. 하지만 이런 윤리위반은 그 당시 우리나라 연구계의 윤리행태에 비춰볼 때 용서 못할 범죄라고 볼 수만은 없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줄기세포 2개를 가지고 이리저리 사진을 찌그러뜨리면서 마치 11개를 만든 것처럼 속여서 논문을 썼다는 점이다. 2004년 논문이 세계 최초로 난자를 이용한 줄기세포를 만든 것에 의의가 있다면, 2005년 논문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라도 줄기세포의 개수가 늘어났어야 했다. 하지만 줄기세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초조해진 황박사는 과학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일부에서는 연구원들이 조작한 것이며 황박사는 잘못이 없다고 그를 옹호하지만, 대법원 판결은 황박사가 “직접 광범위한 실험 데이터 조작 및 논문의 허위내용 기재를 지시”했다면서 파면처분이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원천기술이 있다. 기회를 달라.” 조작이 드러난 뒤 황박사는 이렇게 스스로를 강변했다. 이 말이 슬펐던 이유는 이게 과학자로서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이 있다는 게 조작을 정당화시킬 면죄부는 될 수 없으니까.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성실해야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있어야 하며, 수백번의 실패를 견딜만큼 끈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조건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정직이다. 황우석 박사에겐 이 덕목이 부족했다. 그가 좋은 과학자가 못되는 이유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교수 프로필
서민교수_3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교수)
1992년 : 서울의과대학 졸업
1998년 : 서울의과대학 박사, 기생충학 전공
1999년부터 현재 :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교수
저서 : 서민의 기생충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