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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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의 역사


설명


우리사회는 농경에 뿌리를 둔 정착적 농업 사회였으며 유교의 영향으로 상류층 사람들이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더구나 거래를 통하여 이익을 남기는 상거래를 죄악시 하였기 때문에 셈을 빠르고 정확히 하는데 필수적인 계산기구가 서민층은 물론 국가기관에서 조차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전문설명


우리사회는 농경에 뿌리를 둔 정착적 농업 사회였으며 유교의 영향으로 상류층 사람들이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더구나 거래를 통하여 이익을 남기는 상거래를 죄악시 하였기 때문에 셈을 빠르고 정확히 하는데 필수적인 계산기구가 서민층은 물론 국가기관에서 조차 실용화되지 못하였다.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산가지(算木)가 유일한 공적 계산 수단이었다. 17세기 중엽 제주도에 닿은 하멜(Hamel,H)의 《표류기》에서나 조선말기의 일본인 견문기에서 시장의 장꾼들이 성냥개비나 잔나무가지를 이용 계산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가지 계산도 국가기관이나 일부 사대부계층에서 썼을 뿐이고 일반에서는 노끈이나 새끼에 매듭을 지어 숫자를 기억하거나 나무에 금을 새기는 이른바 각목법(刻木法)을 이용하였다.중국에서 주판이 들어왔지만 사대부 계층의 일부 식자들만 관심을 가졌을 뿐 19세기말 까지도 일반인은 물론 관공서에서도 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구구셈은 본래 중국에서는 지금과는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가 송원(宋元)시대 이 후 작은 수끼리의 곱셈으로 바뀌어져 조선초기에 전해진 이래 말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나라 수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상명산법(詳明算法)」,「양휘산법(楊輝算法)」,「산학계몽(算學啓蒙)」등에서 구구셈 1단으로 시작하고 있다. 0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876년에 세워진 인도 간디스강변의 비문에 새겨진 내용이며 중국에 13세기 말쯤 0의 기호가 등장하였으며 곧이어 한국으로 전해졌다.


참고문헌


ㆍ박흥수, 『한국의 도량형』, 국립민속박물관, 1997ㆍ이우태, 『한국 고대의 척도』, 태동고전연구 창간호, 1984


 


자료제공 국립중앙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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